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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최초 의병 일으켜 왜적 소탕…청도읍성 탈환
◆ 자녀와 함께 떠나는 청도여행…금천면 임당리 임호서원
방어망 사수 밀양도호부사직 겸직 공로…경주성 전투로 순국
후손들'삼우정 박경신 장군 재조명' 역사체험학습장 소망 가득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15년 05월 07일(목)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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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정문에서 바라본 임호서원 본채. | | ⓒ 경북연합일보 | | , |  | | | ↑↑ 삼우정 선생 신도비(오른쪽)와 경의관 (중앙). | | ⓒ 경북연합일보 | | , |  | | | ↑↑ 선무원종공신록권(보물 1237호). | | ⓒ 경북연합일보 | | 을지문덕, 강감찬, 이순신 장군 같이 우리나라와 민족을 구해낸 위대한 영웅들이 대한민국 오천년 역사에는 많이 있다. 게다가 초야의 뭇 백성과 산중의 스님들이 임진왜란 같은 절체절명의 국난을 극복하고자 의병과 승병을 일으킨 창녕의 곽재우 장군과 밀양의 사명대사 같은 분도 적지 않다. 그때 청도에도 이와 같은 영웅들 못지않게 분연히 떨쳐 일어나 의병을 창의하고, 왜군을 크게 무찔러 청도와 밀양은 물론 경주성 전투에서 사선을 넘었던 참으로 고마운 분이 있다. 삼형제간의 우애를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겨 '삼우정(三友亭)'이라 불리기를 바랐던 박경신(朴慶新) 장군은 1539년 9월 9일(이하 음력) 밀양박문으로 청도군 이서면 수야리에서 출생했다.어릴 때 가족을 따라 금천면 신지리(섶마루)로 이거했다. 그곳에서 친조부인 소요당 박하담, 삼족당 김대유, 경재 곽순 선생으로부터 글을 배웠다. 사서삼경과 무경칠서를 통달한 그의 총명함으로 청도의 동면과 서면에서 호동과 성동으로 각각 불렀다. 1569년(31세) 무과초시 급제, 이듬해 무과복시 급제, 1573년 무과전시에서 장원급제해 적순부위 훈련원참군에 임명됐다. 1589년 건공장군 훈련원부정에 승진했다. 53세 때인 1591년 5월 더 이상의 벼슬길을 마다하고 휴가를 얻어 섶마루 자택으로 돌아왔다. ◇전국 최초 의병 창의, 청도읍성 탈환 ^ 이듬해인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왜군의 진격로였던 밀양과 청도는 순식간에 쑥대밭이 되었다. 청도읍성이 빼앗긴 지 불과 사흘 뒤인 4월 23일 박 장군은 소요당과 삼족당을 향사하던 선암사(현 선암서원)에서 사촌동생인 박경전, 박경윤 등과 지남 철남 두 아들을 비롯해 박씨문중 장정 십여명을 불러 모아 맹약문을 읽으며 전국 최초로 의병을 창의했다. 같은 날 날이 저문데 박 장군은 나라의 위급한 상황을 알리러 혼자서 말을 몰아 서울로 향했다. 당시 도승지 이항복과 임금을 만난 장군은 선조의 피난길을 호위해 평양까지 갔다. 5월7일 청도조전장의 명을 받아 단기필마로 평양을 떠났다. 온 나라 길목마다 가득 찬 왜군과 싸우기도 하고 피하기도하면서 7월1일 가까스로 청도에 돌아왔다. 이때까지 청도의 의병들은 전략과 전술은 물론 병기와 병력이 주둔 중인 왜군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상황으로 운문산에 숨어서 버텨오고 있었다. 박 장군은 돌아오는 길에 만났던 경산 자인의 최문병 의병장에게 지원을 요청하고, 대구 최정산에 숨어있던 당시 청도군수 배응경을 합세시켰다. 7월5일 청도관내 동서면의 장정들을 격문을 보내 의병으로 모았다. 7월9일 새벽을 지나면서 "너희들은 모두 용감한 사람들이다. 적과 맞닥뜨려 먼저 물러서서는 안된다. 오로지 있는 힘을 다하여 왜적을 무찔러라"고 명령을 내리고 활을 메고 앞장서서 말을 달렸다. 청도와 자인의 칠팔백의 모든 의병들이 그 뒤를 따랐다. 여러 왜군이 성을 뛰쳐나와 칼날을 번득였다. 장군의 활시위가 당겨졌다. 쉬익 바람을 가르며 날아간 화살은 맨 앞의 왜장 가슴 한복판에 박히면서 거꾸러뜨렸다. 아군 진영의 사기가 크게 진작돼 여러 장사들이 다투어 돌격했다. 드디어 아군은 모두 청도읍성에 들어갔다. ◇혁혁한 전공, 밀양부사 겸직 ^ 청도의 의병들이 청도읍성을 두 달 여 만에 탈환했으나 7년간 계속된 임진왜란은 시작에 불과했다. 특히 밀양과 청도지역은 왜군의 진격로이자 보급로로써 피해가 막심했다. 청도읍성 탈환 후 일부 의병장들의 충정어린 반대에도 불구하고 박 장군은 도피했던 배응경 군수에게 모든 지휘권을 넘기고 청도조전장의 책무에 충실했다. 온갖 희생과 역경을 겪었으나 그에게는 결코 굴함이 없었다. 그의 지략과 용맹함은 왜군들에게는 두려움의 화신이었고, 백성들에게는 천지신명의 보살핌과도 같았다. 임진년과 그 이듬해 청도의 사계절은 전투에서 시작해서 전투로 끝이 났다. 그 선봉에는 오십대를 훌쩍 넘긴 장년의 한 장수가 장검을 어깨에 메고 활시위를 단단히 메워 당기며 전광석화 같이 말을 달렸다. 그날 창의의 붉은 피를 나눠 마신 십여명의 의사들은 물론 뒤이어 합세한 청도의 모든 의병들이 곳곳에서 사력을 다했다. 1593년 4월1일 조정에서는 박경신 장군의 공적을 높이 인정해 밀양도호부사직을 겸직하게 했다. 부사 겸직은 박 장군의 전장이 확대돼 경주성 전투를 비롯해 경상도 병사 박진, 창녕의병장 곽재우, 방어사 김응서 등과 협력해 밀양과 청도의 방어에 온 힘을 기울여 왜적을 몰아냈다. 경주성 대공세 때는 십여군데의 전상을 입고 사선을 넘기도 했다.이에 좌상 윤두수가 조정에 보고해 1593년 윤 11월20일에 가선대부의 교지를 내렸다. 이듬해인 1594년 5월25일 오랜 전투와 부상으로 병세가 깊어진 박 장군은 양자였던 두암 이기옥 참봉('삼우정박경신선생실기' 원저자, 이 글은 1994년 4월22일 경의계에서 편집하고 임란공신숭모회에서 간행한 한역 삼우정박경신선생실기에 근거했음)에게 창의와 관련된 일지와 시, 서 등 문서의 정리를 당부했다. 박 장군은 6월5일 밀양부 관사에서 두 아들과 이기옥참봉이 받드는 가운데 순국했다. 1605년 선조38년 선무원종공신1등에 녹훈되고 녹권이 하사됐다. 단 두 권만 전해오는 '선무원종공신록권'과 '절지수(포상확인서)', '교지' 등 4종 17점의 유물들은 1997년 1월 17일 보물 제 1237호로 지정돼 국립대구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임호서원 경의사에 배향, 4종17점 보물 남겨 ^ 지난 2일 청도군 금천면 임당리 소재 임호서원에서는 삼우정 박경신 장군의 직계자손들이 문중모임을 가지고 있었다. 소식을 듣고 갑자기 찾아온 필자 일행에게 맛난 음식을 대접했다. 9년 전 임당리에 귀향해 문중일을 맡고 있다는 제 14대손 박희상 씨가 박경신 장군과 지남 철남 두 아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경의사와 유물 등이 전시돼 있는 경의관을 안내했다. 그는 "삼우정선생은 이 땅과 사람들을 지켜낸 분입니다. 그 정신을 이어받는 일은 우리 후손들의 몫입니다"며, "지역에서 가장 뚜렷하고 분명하며 혁혁한 공적을 세운 박경신 장군의 재조명과 더불어 역사체험학습장을 세우면 좋겠다"고 말한다. 문집발간도 숙제로 남아있다고 한다. '창의일록'이 포함된 삼우정박경신선생실기에는 박 장군의 임진란 백전백승의 전공이 적혀 있다. 또 삼우정 선생의 빽빽한 숲과 같은 학식과 그윽한 호수 같은 인품을 엿볼 수 있는 시와 서 등이 소담스레 담겨 있어 청소년들이 교양과 교훈을 쌓기에 부족함이 없다. 강병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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