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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상금 보다 실질적 대책 마련해주오"
나아리 생계대책위 전인식 대표
형제·자식들에 부끄럽지 않게
시범마을 제도화 육성 촉구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15년 05월 06일(수)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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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전인식씨 | | ⓒ 경북연합일보 | | 경주시와 한국수력원자력, 동경주대책위 대표단이 지난달 29일 월성원전 1호기의 재가동에 전격 합의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 소식은 너무나 뜻밖이었고, 근로자의 날인 5월 1일부터 어린이날까지 5일간 징검다리 연휴가 이어졌다.월성원자력발전소 코앞에서 넉 달째 농성을 이어오던 나아리 생계대책위 대표 전인식(75·사진)씨의 속마음은 까맣게 타들어 갔다. “이제 이 일을 어쩌나? 안 그래도 생계가 막막한 주민들을 또다시 불러내서 내가 무슨 죄를 받으려나?…"전씨는 얼마 전 폐업해 매일 밤술로 잠을 청한다는 김씨의 얼굴이 떠올랐다. 또 마흔이 넘도록 장가 갈 돈도 마련하지 못했으면서도 '이주민상가' 일이면 앞장서 화장실도 고치고 쓰레기도 치우던 박군의 서글서글한 웃음도 생각났다. 전씨는 마음을 단단히 고쳐먹었다.이곳에서 한평생을 보낸 자신에게 주민들이 또다시 대표를 맡아 달라고 찾아왔던 그날 밤, 평범한 이름이지만 부모가 물려준 '전인식'이라는 이름 석 자가 부끄럽지 않도록 애써야겠다고 다짐했지 않았던가."주민들은 오전 10시 월성원전 입구에 다 모이세요. 우리들의 억울함을 알리고 권리를 찾읍시다" 전씨는 연휴가 끝난 6일 합의 전에는 두개조로 나눴던 농성조를 한조로 합쳤다.바다도 농토도 다 수용된 마당에 한수원과 경주시가 나눠먹기식으로 합의한 내용을 뒤집지 못하면 400여명의 생계는 회복불능에 빠진다는 절박함이 엄습했던 때문일 것이다. 1976년 35세의 푸르런 나이에 울산에서 부인과 오남매를 데리고 이곳에 온 전씨.1984년 월성1호기 준공을 앞두고 퇴직했으나 이곳에 눌러 앉았다.월성 2~4호기가 들어서면서 1998년까지 두 번의 이주가 있었고, 전씨는 그 때도 이주대책위를 맡았다. 태고 적 아름다움을 간직한 나아해수욕장이 폐쇄되고 아이들이 다녔던 정든 나산초등학교가 교적비만 남기고 옮겨간 것도 그 당시다.전씨는 "이주민들이 1년에 쌀 세 가마와 소금 살 돈이 나오면 주먹밥을 만들어 연명하지 않겠느냐"며 당시 한전 사장을 설득했다고 한다.그 돈으로 전씨와 이주민들이 세운 '나아리 이주민상가'는 20년 째 이주민들에게 매년 60만원 가량의 배당을 주고 있다. 구본무 한전 사장과의 협상 때 전씨는 58억원을 요구하다 협상을 위원장에게 넘겼다. 30억원의 적은 돈이 나왔고, 그 종자돈의 주민 투자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전씨는 그 때의 아픈 기억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혔다. '원전이 뭐 길래, 보상금이 뭐길래. 착한 주민들이 이토록 마음고생을 해야 하나?'는 회한이 몰려왔다. 그래서 부인 이금주씨는 전씨의 활동을 극구 말렸다고 한다.한수원이 말로만이 아니라 나아리를 제도적인 '시범마을'로 육성해줄 것과 나눠먹기 이전에 최인접지역에 대한 실질적인 대책마련을 요구한다는 전씨. 마지막 말과 함께 그의 얼굴에 비장함이 묻어난다."인생은 죽으면 끝나지만 형제와 자식들에게 부끄러운 이름을 물려줄 수 없지요" 강병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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