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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충대절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15년 03월 06일(금)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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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김영호 | | ⓒ 경북연합일보 | |
세조가 단종을 축출하고 왕이 되어 당시 동부승지인 성삼문에게 옥새(玉璽)를 가져오라는 어명(御命)을 내렸다.
성삼문은 어명을 어기지 못하여 통곡을 하며 환관을 시켜 옥새를 전달하였다고 한다.
직접 옥새를 가지고 가는 것이 임금에 대한 신하의 도리인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정당한 절차를 거쳐서 왕위에 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임금의 자리를 차지했다 할지라도 임금으로 대접하기가 싫었던 것이다.
그래서 임금이 지녀야하는 옥새를 직접 전하지 않고 환관을 시켜 대행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오로지 단종을 복위시켜야 한다는 마음을 굳게 가지고 그때부터 성삼문은 복위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밀고자에 의해 그 계획은 허사가 되었으나, 불사이군의 충의와 절조를 견지하고 죽음으로 항거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삼형제와 네 아들을 비롯한 가족 모두가 참화를 입었지만 오직 충을 위해 불굴의 절개와 지조를 지킨 것은 한낱 역사에 묻힌 기억으로만 남을 수 없는 교훈이다. 몸종이 마지막 술잔을 올릴 때 “북소리 이 목숨을 재촉하고 있는데 돌아보니 지는 해 서산을 막 넘어 가네. 황천길에 주막은 없을 터인데 오늘 밤은 뉘 집 찾아 쉬어 갈까” 태연자약하게 충절을 읊었던 것은 새삼 가슴 뭉클한 감격을 준다.
나라를 지키고 발전시킨 과정에는 위정자를 중심으로 단합된 충직한 국가 공무원이 있었다. 멸사봉공의 정신으로 목표달성을 위해 임무를 명심하고 헌신적으로 참여했던 청백리가 존재했던 것이다.
백면서생도 국란을 당했을 때 붓을 던지고 분연히 일어나 창칼을 잡고 적과 싸우며 나라를 구하고 부모 형제와 향민을 지키느라 귀중한 목숨을 바쳤던 것이며, 국민들은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위험하고 힘든 천역을 불평 없이 스스로 맡아 혈한(血汗)을 흘리며 일 했던 것이다.
오늘날 다수의 시민들이 되는 일이 없다고 한다. 말은 윤택하나 실물경제가 냉각되어 가게에는 손님이 없고 예약이 줄을 서던 팬션 사업도 텅 빈 주말을 보낸다고 한다. 경제지표는 입춘이나 체감경기는 대한이라 하니, 어려운 세태임은 틀림없는 것 같다.
“콩가루 집안이 아니라 찹쌀가루 집안을 만들겠다.”는 정치인의 말이 들리고 있어서 퍽 다행스러우나 찹쌀가루도 따뜻한 물로 반죽이 되었을 때 접착이 가능한 만큼 무엇 보다 ‘충(忠)’의 신념이 위국보민의 강력본드라는 것에 뜻을 같이 해 주었으면 한다.
원래 충(忠)은 ‘中’과 ‘心’을 합성한 글자로서 ‘속마음’ ‘거짓 없는 마음’을 이름 하는 것이며, 허위와 자기기만이 없는 성실한 대자관계(對自關係)를 지시하는 것이다.
또한 사사로움이 없는 것을 충이라 하였고, 사사롭게 하여 공을 해(害)하는 것이 비충(非忠)이라 하였으니, 진실하고 허위성이 없는 인간의 내면적 주체성을 충이라 하였다.
공직자가 기본적으로 충의 신념을 굳게 내면화하여 언행에서 바른 법도를 가질 때에 구호적?허위적 위장성(僞裝性) 행위는 없을 것이고 선현들의 정충대절을 모델링한다면 국가사회는 가속적 선진화?문명화로 정산될 수 있다고 본다.
같은 정치적 신념을 가지고 출발한 정치집단이 ‘친박’, ‘비박’이니 ‘친노’, ‘비노’등으로 사색 분할되어 ‘안정과 결속’ ‘개혁과 혁신’ 및 ‘지적공세’ ‘반칙분노’ 등의 갈등과 대립적 반목이 나타나고 있어서 국민을 편안하게 살도록 하는 정치에 마치 난치의 신종 바이러스가 침투된 것 같아서 걱정스럽다.
행지(行止) 즉 가고 멈춤인 고(go) 스톱(stop)을 바르게 하도록 하는 것이 요구되는 것 같다. ‘황천길에는 주막이 없다 하지 않았던가.’ 정충대절(貞忠大節)로 떠나가신 충신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것 같다. <김영호 교육학박사 사단법인 경주사회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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