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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 기획/특집
외교 독립 앞장 선 이승만, 자유 대한민국 초석 놓다
[광복 80주년 ‘민족의 영웅’]
청년기 독립협회 활동으로 수감 생활
‘총 대신 펜으로’ 외교 통한 독립 주장
엇갈리는 평가에도 의미 깊은 노력들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25년 08월 13일(수) 18:48
이승만을 기억하다
오는 8월 15일은 광복 80주년을 맞는 날이다.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무조건 항복과 함께 찾아온 해방은 오랫동안 억눌렸던 한민족에게 숨결을 불어넣었다. 한반도의 하늘 위로 태극기가 다시 펄럭이던 그날, 사람들은 마침내 ‘조선’이 돌아왔다는 사실에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피와 고통 끝에 이뤄낸 광복은 결코 하루아침에 주어진 선물이 아니었다. 수많은 이들이 국경과 대륙을 넘나들며 독립운동을 하고, 국제 여론에도 호소하는 등 조국을 찾기 위해 온몸을 바친 결실이다. 그 길 위에는 논란 속에서도 결코 지워지지 않는, 한 인물이 있다.

↑↑ 이승만과 김구.
ⓒ 경북연합일보
이승만(李承晩, 1875~1965년)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자 태평양 건너의 독립운동가였던 그는, 총 대신 펜을 들고 바다를 건넜다. 미국의 수도와 언론, 국제회의장을 무대로 조국의 독립을 호소했고, 세계 강대국들의 책상 위에 ‘코리아’라는 이름을 올려놓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외교 독립론은 종종 비판받았지만, 그는 끝내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해방 직전까지 그는 미국에서 외교 활동을 이어가며,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을 국제사회 속에 계속 새겨 넣었다.
광복 80주년을 맞아 이승만이라는 인물을 다시 꺼내 본다. 찬사와 함께 비판도 따라다니는 그의 생애 가운데, 오늘만큼은 광복 이전의 행적과 그 여정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이것은 한 인물의 이야기를 넘어, 해방과 독립이라는 단어가 품은 눈물과 희망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의 여정은 오늘까지도 우리 민족사에 많은 의미를 던지고 있다.

↑↑ 한성감옥 투옥 시절(좌측 이승만).
ⓒ 경북연합일보
한성감옥에서 태평양 건너까지
이승만의 청년기는 외세의 압박이 거세지던 대한제국 말기와 맞물려 있다. 1896년 독립협회 활동에 참여해 자주와 개혁을 주장했고, 1899년 1월 체포돼 약 5년 7개월의 수감 생활을 했다. 옥중에서 그는 도서실과 학교를 마련해 독서와 집필을 이어가며 서구 정치사상에까지 눈을 넓혔다. 그곳에서 ‘독립정신’ 원고를 완성했다.
1904년 8월 9일 특별사면으로 석방된 그는 같은 해 11월 선교사들의 주선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승만.
ⓒ 경북연합일보
워싱턴의 조포지워싱턴대에서 1907년 학사, 하버드에서 1908~1909년경 석사, 프린스턴에서 1910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1905년 포츠머스조약 국면에서 그는 윤병구와 함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한국의 주권 보장을 청원하는 외교활동을 벌였다.
이후에도 미국의 의회·행정부 그리고 언론과 여론을 무대로 한 외교 독립 활동을 꾸준히 이어갔다.

↑↑ 임시정부 대통령 공식 초상화.
ⓒ 경북연합일보
펜으로 싸운 초대 대통령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국외에 머물던 이승만은 임시의정원에서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당시 그는 하와이에 머물며 한인기독교회와 대한인국민회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는 무장투쟁보다 외교를 통한 독립을 주장하며, 미국 의회와 정부, 국제회의를 무대로 조국의 독립을 호소했다.
그러나 1919년 초 파리강화회의 시기,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아래 두자는 내용의 청원서를 제출한 사건은 완전한 자주독립을 외치던 임시정부 인사들에게 큰 반발을 샀다.
무장투쟁 노선을 중시한 세력과의 갈등은 깊어졌고, 1925년 3월 임시의정원은 대통령직 탄핵을 의결했다.
탄핵 이후에도 그는 외교 활동의 끈을 놓지 않았다. 하와이에서 학교를 운영하며 한인기독학원 등 한인사회를 조직했다. 1941년에는 로버트 T. 올리버와 함께 저술한 ‘Japan Inside Out’을 출간해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성과 팽창주의를 고발해 미국 사회에 경각심을 주었다.
그는 이렇게 총 대신 펜을 들고 외교 독립의 길을 걸었다.

광복을 맞이한 먼 이국땅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한반도에 광복이 찾아왔다. 그러나 그 순간 이승만은 조국이 아닌 미국 워싱턴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해방이 임박한 시기까지도 미국 내에서 한국의 독립과 전후 질서에서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외교 활동을 이어갔다.
광복 직후 미군정은 그를 ‘유력한 정치 지도자’로 초청했고, 1945년 10월 16일 김포비행장(김포국제공항)을 통해 33년 만에 고국 땅을 밟았다.
귀국 성명에서 그는 “이제 우리는 독립민으로서 단결해 자유와 평화를 누려야 할 것입니다”라고 강조했다.
그의 귀국은 해방된 한반도의 정치 판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까지의 그는, 훗날의 정치 논란보다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가로서의 모습이 더욱 부각됐다.

↑↑ 이승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취임식 및 제3회 광복절 기념식.
ⓒ 경북연합일보
역사 속에 남은 이름
이승만은 광복 이후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한국전쟁, 그리고 장기 집권과 4·19혁명으로 이어지는 격변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의 정치적 공과에 대한 평가는 지금까지도 엇갈린다. 그러나 광복 이전의 행적만큼은, 해외 각지를 무대로 외교와 선전 활동을 벌이며 조국의 독립을 알리고 외친 ‘독립운동가의 길’이었다.
그의 외교 독립 노선은 위임통치 청원 사건 등으로 무장투쟁을 중시한 동지들의 비판을 받았지만, 국제회의와 미국 정치권을 통해 한국의 존재를 알리려 한 그의 부단한 노력은 분명히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해방 80주년을 맞은 이제, 우리가 ‘이승만’이란 이름을 부르는 순간, 우리는 해방과 독립이 품은 복합한 기억과 그 속에 담긴 다층적 의미를 다시 만나게 된다.고병희 기자
경북연합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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