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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특집] 전쟁은 기억하지만, 잊고 있던 이야기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25년 06월 24일(화)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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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한민족 최대 비극인 한국전쟁 발발 75주년이다. 통상 ‘6·25전쟁’ ‘6·25’로 일컫는 한국전쟁(韓國戰爭)은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위 38°선 전역에 걸쳐 북한군이 불법 남침함으로써 일어난 한반도 전쟁이다. 올해는 유엔군사령부 창설 75주년이기도 하다. 전쟁이 터진 직후인 1950년 7월 24일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이 북한의 침략으로부터 한국을 구하기 위해 보냈거나 보낼 군대를 지휘할 유엔군사령부가 일본 도쿄에 설치됐기 때문이다.
‘6·25’는 우리 민족에게나 국제적으로나 엄청난 영향을 끼친 사변(事變) 중의 사변이다. 이 전쟁은 물질적인 면보다 오히려 정신적인 면에서 우리 민족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남겼다. 전쟁 자체가 맹목적인 이데올로기의 싸움이었기 때문에, 민중들은 일방적으로 어느 한쪽을 선택하도록 강요당했다. 그런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무고하게 희생됐다. 남측에 의한 희생 사례로 대표적인 것은, 보도 연맹원과 형무소 재소자 사살, 거창 사건, 노근리 사건 등이고, 북측에 의한 희생 사례는 인민재판을 통한 경찰, 공무원, 우익 인사들의 학살 등이다.
이 6·25전쟁으로 ’남한은 정치·경제적으로 더욱 미국에 예속되었으며, ‘극단적인 반공 이데올로기’가 초법적 권능을 지니며 오랫동안 남한 사회를 지배했다. 북한에서도 노동당의 독재가 더 강화돼 김일성이 절대적인 권력을 쥐면서 ‘노동당의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전횡을 일삼았다. 특히 이 전쟁을 계기로 분단체제는 더욱 고착화 되었다.
본보는 기존의 전쟁 관련 특집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으로 6·25를 조명해 보고자 한다.
<카폰 대위가 우리에게 남긴 6·25의 진정한 의미>
|  | | | ↑↑ U.S. Army, Sgt. 1st Class Raymond Piper 촬영, 1950년 10월 7일 (퍼블릭 도메인).png | | ⓒ 경북연합일보 | | 전쟁은 언제나 사망자, 전투일수, 병력 규모 등 피로 새겨진 숫자들을 남기고, 우리는 그 숫자로 그 전쟁에 대해 개관하고 기억한다. 하지만 모든 전쟁엔 숫자로는 기록되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1950년 11월, 평안북도 운산 전투. 후퇴 명령이 떨어진 전장에서 한 미국인 군종신부는 부상병들을 남겨둔 채 후퇴하길 거부했다. 그는 스스로 포로가 되기를 택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에밀 조셉 카폰 대위. 총 대신 성경을 들었던 그는 포로수용소에서도 끝까지 인간다움을 잃지 않았고, 자신의 생을 동료들에게 바쳤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의 선택’은 오늘날 우리가 기억해야 할 6·25전쟁의 참상과 진정한 의미를 보여준다.
1.우리는 전쟁을 기억하지만, 그 안에서 일어난 이야기는 잊고 있다
매년 6월이 되면, 우리는 또다시 ‘현충일과 6·25’라는 이름을 마주한다. SNS에는 추모 이미지가 올라오고, TV에선 전쟁 다큐멘터리가 재방송된다. “전쟁을 잊지 말자” 아니 “전쟁의 참상을 절대 잊지 말고, 전쟁 재발을 막자”는 다짐은 반복되지만, 정작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나라를 지켰다”는 말은 지금도 자주 들리지만, 그 말 속에 있던 얼굴, 눈빛, 목소리는 어느새 우리 기억에서조차 흐릿해지고 있다. ‘6·25’는 여전히 달력에 남아 있지만, 그날의 진짜 모습은 사람들 기억 속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2. 한 사람의 선택
1950년 11월 1일 오후 5시경. 전투 준비가 끝나기도 전, 중공군의 총성이 갑작스레 울려 퍼졌다. 잠시 숨을 고르던 병사들은 그대로 다시 전쟁 속으로 내던져졌다. 평안북도 운산 전투였다. 미 제1기병사단 8기병연대 3대대는 전열을 갖추기도 전에 기습을 당했고, 방어선은 빠르게 무너졌다. 퇴각 명령은 내려졌지만 이미 포위망은 좁혀지고 있었다. 병사들은 어둠이 내린 산길을 따라 흩어졌고, 후퇴는 말 그대로 생존이 걸린 탈출이었다. 부상자들과 끝까지 남은 이들에겐 그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그날 현장에 있던 한 미군 장교는 후퇴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남기를 택했다. 그 장교는 ‘에밀 조셉 카폰’ 대위다. 군종신부였던 그는 계급은 장교였지만 손엔 성경을 들었고, 어깨엔 소총 대신 ‘응급 의료 배낭’을 둘러멨다. 탈출로가 열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부상병 곁에 무릎을 꿇은 그는 조용히 손을 잡고, 마음속으로 짧은 기도를 올렸을 것이다. 그 순간 카폰 대위는 남기로 했다. 다친 병사들 곁에 있기 위해, 스스로 포로가 되기를 택한 것이다.
3. 얼어붙은 포로수용소, 꺼지지 않은 신념
포로수용소는 또 다른 전장이었다. 총알 대신 굶주림과 추위가 병사들의 생명을 갉아먹었고, 인간의 존엄은 매일 끊임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누군가는 체념했고, 누군가는 마음속에 화를 품었지만, 카폰 대위는 끝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그는 매일같이 병사들을 돌봤다. 더러운 그릇을 씻고, 병자를 부축하고 물을 떠 와 자신보다 남을 먼저 먹였다. 그는 항상 먼저 움직였고, 말보다 행동이 앞섰다. 그에게 신앙은 말이 아니라 실천이었다.
4. 숫자가 아닌 이름으로 남는다는 것
웨스트포인트 신임 소위 365명 중 110명 전사 대부분은 숫자로 사라졌지만(전쟁의 참혹함을 알리는 통계 도구), 카폰은 이야기로 남았다 훈장, 시복 절차, 유해 송환…과정이 카폰이란 사람을 기억에 새겼다
카폰 대위는 결국 포로수용소에서 숨을 거뒀다. 탈진과 폐렴으로 쓰러졌고, 동료 병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외딴 오두막으로 옮겨진 뒤 제대로 된 치료 없이 그곳에서 숨을 거뒀다고 한다. 죽음은 침묵만을 남긴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남긴 이야기는 오래도록 사람들 사이에서 잊히지 않았다. 종교의 울타리를 넘어, 인간으로서 지킨 책임과 연민은 칠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회자되고 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국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 신임 소위 365명 가운데 110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됐다. 대부분은 기록 속 숫자로 남았지만, 카폰 대위는 달랐다. 2013년,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은 그에게 명예훈장을 수여했다. 전쟁 후 70년 가까이 유해가 돌아오지 않았지만, 2021년 하와이에서 신원 확인을 거쳐 고향 캔자스로 돌아갔고, 현재는 시복* 절차가 진행 중이다. (*시복: 가톨릭에서 성인으로 추대되기 전, 교회가 신앙과 삶의 모범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절차)
|  | | | ↑↑ U.S. Army, 퍼블릭 도메인.jpg | | ⓒ 경북연합일보 | | 5. 6·25를 다시 묻는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 남을 수 있는가-
카폰 대위는 사람을 위해 남았다 전쟁터에서의 그의 선택을 빗대어 말했지만, 비단 우리도 카폰처럼 오늘날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그를 기억하고 고민한다는 건, 지금 우리 삶의 태도를 바꾸는 일이다. 카폰 대위는 무기를 들지 않았지만, 자신만의 방식으로 끝까지 전장을 지켰다. 명령이 아닌 양심에 따라 움직였고, 살 수 있는 길 대신 ‘남는 길’을 택했다. 끝까지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한 것이다. 우리는 매년 6·25를 기념한다. 그날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지는 각자의 몫이다. 기념비를 바라볼 때, 그 뒤편에 있었던 사람들을 함께 떠올릴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전쟁을 기억하는 가장 사람다운 방식일 것이다. 고병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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