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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시간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25년 04월 16일(수) 18:56
↑↑ 서유진 소설가
ⓒ 경북연합일보
지난밤 비바람 소리에 뜬눈으로 새벽을 밝혔다. 비가 조금만 더 일찍 와 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화마가 핥고 지나간 삶의 터전을 다시 일구기 위해 새까맣게 타들어 간, 쓰린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래도 어떻게 해봐야지, 살아남았으니 다시 시작해야 한다.’며 과수원으로 향하는 동료 작가의 아버지. 그가 딸의 손에 이끌려 대구로 피신했을 때는 식음을 전폐하며 강소주만 들이키며 울부짖었다고 한다. 과수원이 평생 자식을 먹이고 가르쳤다. 딸은 달랬다.
아버지가 이런다고 다 타버린 사과나무가 살아나지 않아요.
목숨이라도 부지해야 한다며 못 가게 하는 딸의 말을 듣고 뉴스만 보고 있으려니 아버지는 몸에 불이 붙은 것 같아 마구 날뛰었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배나무밭과 복숭아밭은 어찌 되었는지, 불에 타 죽더라도 가서 애나 써보고 죽겠다고 해서 딸은 함께 고향으로 갔다.
아무것도 없었다. 아버지는 주저앉아 통곡했다. 한 해 농사만 망한 줄 아는 도시 사람들은 그것을 모른다. 토양이 회복되고 묘목이 자라 열매를 달 때까지는 수년이 걸린다는 것을. 그러나 그것보다 재난을 당한 사람들을 괴롭히는 감정이 있다. 불타고 있는 화마를 보며 발버둥 치고 부르짖을 때와는 달리 벌거숭이가 된 과수원을 보는 순간 이상하게 발가벗긴 듯한 수치감이 들었다고 한다.
재난의 피해자가 왜 수치감을 느껴야 하는가? 이해하기 힘든 심리 현상이다. 그것을 예로 들어 설명하면 수염과 털을 강제로 밀린 남자 포로가 느끼는 분노에 찬 수치감, 그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운명에게 또는 자신이 믿는 신에게 버림받은 듯한 수치감이다. 지금까지 자연과 벗하여 살며 누굴 속이지도, 원한을 사지도 않았고 선량하게 살아왔는데 왜 하필 내가 재난의 주인공이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어떤 이는 대학시절에 어머니를 잃었는데 부끄러워서 사람을 만날 수 없었다고 한다. 자신이 어머니를 죽게 한 원인 제공자인 것처럼 죄인이 되어 버린다고. 그 심리적 기저는 복잡한 무언가의 원인이 있겠지만 다른 사람은 당하지 않는 고난을 왜 나만 당하는가, 하는 관점이 재난을 당한 사람에게 중요하게 작용한다. 쟤 엄마 죽었대, 하는 말을 친구들이 할 거라는 생각이 들면 숨고 싶어졌다고 한다. 지금이야 암이 너도나도 걸리는 시대지만 과거에는 암에 걸리면 나병에 걸린 것처럼 감추었다. 벼락을 맞아 죽은 사람의 가족 역시 그의 죽음을 순수한 마음으로 이야기하지 못한다.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분리감이 수치감을 낳는다. 그 수치감은 알 수 없는 고난을 당하는 우리의 삶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기에 왜 나는 이런 일을 당하는가, 하는 자기 성찰이 주는 반대급부적인 현상이 아닐까?
전도서가 조금은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일하는 자가 그의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왜 하나님은 미래의 일을 알게 하지 않으셨을까? 대답은 간단하다. 우리가 모르는 게 약이 되기 때문이다. 내일 일을 안다면 어디 불안해서 하루인들 마음 편히 살겠는가? 전도서 3장에서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라.

정원기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의 이 힘든 상황에 함몰되어서는 안 된다. 인생은 변화무상하고 다양한 시간의 패턴이 있기 때문이다. 올라갈 때가 있고 내려갈 때가 있다는 것은 신의 섭리이다. 이 고난의 시간은 영생의 시간 중 한 점에 불과하고 시간이 지나면 상황은 바뀐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은 아니다.
동료 작가의 아버지의 말대로 세상 끝날 때까지 그래도 어떻게 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살아남았으니 다시 시작해야 하지 않겠는가.
경북연합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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