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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을 베푸는 손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나는 훌리아 아주머니와 결혼했다’-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25년 03월 03일(월)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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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서유진 소설가 | | ⓒ 경북연합일보 | | 양갓집의 한 젊은이에게 강간을 당한 후 임신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어느 세탁부는 남편도 없이 어떻게 애들이 여덟씩이나 되었는지 생각하고는 낙태를 결심하고, 현명하다고 알려진 어느 늙은 산파가 지어준 독한 조제약을 마셨다. 그 약은 산파의 오줌에 쥐들을 빠뜨려 놓은 것이었으니 태아가 떨어질 리 없었다. 강간을 당해 태어난 아이는 제 어머니의 자궁 속에 있었을 때부터 저를 끈질기게 살아남도록 했던 집요한 생존 의지를 확실히 보여주었다. 아이는 더러운 음식 찌꺼기들을 놓고 거지들이며 개들과 싸우면서 긁어모은 온갖 구역질 나는 것들을 삼킴으로써 제힘으로 먹고살 수가 있었다. 제 형과 누나 넷은 영양실조와 식중독으로 파리처럼 죽어갔고, 나머지 넷도 구루병과 정신질환에 걸렸지만, 이 아이만은 건강하고 튼튼하게, 정신적으로도 비교적 건전하게 자라났다. 아이는 구걸, 구두닦이, 신문팔이 등 온갖 일을 다 했다. 때가 시커멓게 낀 손톱에 더러운 신발, 서캐가 득실득실한 머리, 누덕누덕 기운 바지를 걸치고 구멍이 뻥뻥 뚫린 낡은 스웨터가 너무 줄어들어 옷에 몸이 꽉 끼인 이 아이가 훗날 페루 전역에서 가장 싸움을 즐기는 교구 성직자가 되리라고 누가 예측할 수 있었을까? 이 이야기는 페루의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장편소설(나는 훌리아 아주머니와 결혼했다)에 나오는 아주 작은 에피소드의 한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 신부는 무력 설교를 주장하고 싸움질까지 하며 교구를 혁신시켜 인기를 얻었지만, 나중에는 초심을 잃어버리고 비극을 초래한다. 필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위의 내용보다 강간으로 태어난 아이가 신부가 되도록 후원해 준 한 부인의 자선에 대한 것이다. 이 소설이 작가 요사의 자전적 소설임을 감안할 때 소년과 교구 신부는 실존 인물일 확률이 높다. 소년은 학교 문턱을 밟아본 적이 없었다. 글을 배운 것은 국회의사당 건물의 문지기가 알파벳과 음절 단위로 나누어 적는 법을 가르쳐주었고, 나머지는 아이가 오로지 끈기와 노력으로 터득했다. 아이의 능력이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말을 들을 만했지만 가난한 세탁부의 아들이 신학교를 졸업하고 신부가 되려면 누군가의 도움 없이, 다른 말로 신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개천 바닥에 황금 덩어리라도 묻혀있었다면 모를까.) 신이 그곳 광대한 영지의 소유자인 한 부인을 택하여 이 소년을 만나게 했다. 부인은 처절한 가난 속에서도 영리한 눈과 고집 센 젊은 늑대 같은 아이의 모습에 마음이 끌려 어머니에게 제안했다. 아이의 교육비와 함께 성직자가 되겠다고 한다면 1000솔레를 내놓겠다고. 어머니가 기뻐 날뛰는 것을 보며 자선가 부인 역시 얼마나 뿌듯했을까. 이 지구상에 이런 자선가가 많이 나서준다면 최소한 아이들이 굶어 죽거나 흙탕물을 식수로 마시지는 않을 것이다. 필자의 동료였던 모 교사도 농촌의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며 학교를 다닐 수 없었다는데 미국 선교사가 주선한 한 후원자의 도움으로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을 졸업해서 교사가 되었다. 좁은 아파트에 일곱 식구를 데리고 살았던 그는 넓은 아파트로 이사하는 게 꿈이었다. 식구가 많아 혼자 벌이로서는 살림이 빠듯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늘 불우한 학생을 돕는 데 앞장섰다. 자신이 어릴 때 받은 도움을 이제 갚으려는 것이다. 성과급 백만 원을 학생의 병원비로 선뜻 내놓기도 하고, 무슨 상금으로 받은 기백만 원을 학생 복지 시설 투자에 내놓았다. 가히 페스탈로치라 할 훌륭한 교사였다. 교인인 그는 매일 밤 자신이 이사하고 싶은―오래된 아파트지만 평수가 넓은―아파트를 일곱 번씩 돌며 기도했다. 7은 완전수로서 완전한 응답의 뜻이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의 여리고 성을 탈환할 때 하나님이 가르쳐 준 승리의 비법을 그대로 따라 했다. 싸움 한 번 하지 않고 오직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고 양각 나팔을 불며 하루에 한 번 엿새 동안 성 주위를 돌다가 일곱째 날은 그 성을 일곱 번 돌았다.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 때 백성이 함께 큰 소리로 외쳤다. 여리고 성이 무너져 내렸다. 이 페스탈로치 선생도 저축한 돈이 없는 상태에서 큰 아파트로 옮겨갔다. 그의 자선에 대한 하나님의 선물이 아닐까? 프랑스의 모랄리스트 라 브뤼예르는 말했다. “부자가 가지고 있는 커다란 행복은 자선을 행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부자라고 다 자선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죽하면 고리키가 이렇게 말했을까? “부자는 빵 한 조각이 천 루블이라도 되는 줄 알고 있다. 빵 한 조각을 희사하면 그것으로 천당의 문이 열리는 줄 알고 있다. 그들은 자기의 양심을 달래기 위해 베풀어주는 것이지 가엽게 여겨서 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고리키의 이 말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라고 한 예수님의 말과 일맥상통한다. G. 엘리엇도 “베푸는 즐거움을 맛보려면 사람은 가난해야 한다.”라고 했다. 동정심과 자선에 대해 경계하는 글이 많다. 필자는 경계 이전에 자선을 베풀라고 권하고 싶다. 우리는 단 하루를 살아가면서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다. 국방을 지키는 군인에서 경찰, 교사, 환경미화원에 이르기까지 곳곳에서 도움을 받는다. 자선에 대한 부정적 정의나 편견 같은 것은 일단 미뤄두고 자비심이 일어날 때 눈치를 보거나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미루지 말자. 내가 알게 모르게 받은 도움을 모르는 누군가에게 갚는다는 마음으로 자선을 베푸는 손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아라비아 속담에 하나님은 인간의 손을 자선하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우리의 손도 도움의 기적을 베푼다면 그분께서 무척 기뻐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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