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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없는 죽음의 메시지
-헤세의 ‘유리알 유희’ 소감-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25년 02월 05일(수)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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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서유진 소설가 | | ⓒ 경북연합일보 | | 일전에 헤세에 대해 쓴 칼럼에 그의 노벨문학상 수상작 《유리알 유희》를 언급한 적이 있다. 오늘은 이 두꺼운 장편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소개하려고 한다. 인터넷을 뒤지기만 하면 수많은 정보와 자료가 쏟아져 나온다. 비평가나 전문가에 가까울수록 그 해설이 소설의 서사보다 헤세가 남긴 사유의 명언에 집중 해석한다. 너무 본질적으로 파고들어 그 사유의 심오함에 실족해서 읽기를 중단할 수도 있는 놀라운 해석도 있다. 헤세의 작품 대개가 그렇듯 깊은 사색의 광장에서 초행길의 여행자처럼 경탄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유리알 유희》를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안내하고자 한다. 장편 《유리알 유희》의 주인공 요제프 크네히트는 총명하고 맑은 영혼의 소유자이다. 그는 주어진 현실에 잘 순응하며 자신의 장래를 향해 견실하게 걸어간다. 우수한 라틴어 학교 학생으로 추천을 받아 영재학교를 다니게 되고 상급학교 발트첼을 졸업한다. 이후 연구시절을 거쳐 수도원에 파견되고 카스텔리엔 출신이라면 누구나 동경하는, 최고의 지위인 유희 명인이 된다. 최연소 명인이었으니 어떤 인물인지 가히 짐작된다. 타고난 좋은 성품과 긍정적 현실순응력으로 최고의 위치까지 순탄하게 오른 셈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한 점 의혹 없이 명인이라는 정상까지 달려왔던 게 아니란 점이다. 이 점이 소설의 주제를 이끌어낸다. 최고 명인을 배출하는 카스텔리엔은 실제 현실에 존재하는 공동체가 아니고 헤세가 소설 속에서 만든 이상향이다. 이곳은 학문과 예술을 연구하고 명상을 통해 지식인의 나아갈 길을 교육하는 일종의 교육주라는 자치지역이다. 종교단체는 아니지만 수도회처럼 엄격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며 오직 정신세계만을 추구하므로 세상과 동떨어져 있다. 유리알 유희가 실제로 어떤 식의 유희인지는 묘사하지 않고 있다. 철사에 유리알 구슬을 꿰어 넣어 유희를 한다는 서술이 잠깐 나오지만, 그것은 유리알 유희로 상징된 도구에 불과하다. 헤세는 어떤 유희인지 사실적으로 설명해 주지 않는다. 독자는 대화와 진술에서 보이는 문장 속의 사유를 통해 어렴풋하게 짐작할 뿐이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기호와 문법으로 신비로운 언어를 구사하는 유희가 여러 학문과 예술, 특히 수학과 음악으로까지 확장한다. 이것은 고도의 정신적 수련을 필요로 하기에 명상을 통해 이르는 생각의 유희를 의미한다. 지적 유희이며 학문적 예술적 정신적 유희를 유리알 유희로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유리알이 얼마나 영롱하고 아름다운가? 지식과 학문과 예술은 얼마나 아름답고 경이로운가? 그러나 유리알은 깨진다. 현실 순응자인 주인공 요제프 크네히트는 명인의 위치까지 무난히 오르는 가운데서도 모순과 의혹을 느낀다. 그는 인간의 학문과 예술과 철학과 종교 등 모든 분야가 완전할 수 없는 유리알에 불과하다는 것을 각성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카스텔리엔이 현실의 세상과 동떨어져 홀로 지적 유희를 구가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이었다. 세상을 등지고 세상과 조화를 이루지 않는 공동체는 폐쇄된 공동체로서 모순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은 요제프 크네히트는 더 이상 유희 명인직에 연연하지 않고 회람을 돌려 카스텔리엔의 모순을 알린 후 명인직을 사직한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그 어떤 예술과 사상과 학문도 세상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언젠가는 깨질 한낱 유리알로 유희를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는 세상에 나가서 어린 소년을 가르치며 소박한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그에게 이런 각성의 계기를 만들어준 친구 플리니오 데시뇨리의 아들을 가르치기로 하고 세상으로 나간 첫날에 친구의 집을 방문하자 소년은 이미 다른 마을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튿날 소년을 만났을 때 그는 극심한 피로감에 지쳐 있었다. 소년이 호수에서 헤엄을 치면서 앞으로 자신을 가르칠 선생에게 함께 헤엄칠 것을 요구한다. 그는 자신의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소년과의 첫 만남에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호수 속으로 들어가 바로 익사하고 만다. 어이없는 죽음의 반전이 뒤통수를 치는 것처럼 아연실색했다. 필자는 잠시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때 잠언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것이 우리 인간이란 말이다. 이렇다 할 완전한 세계에 도달할 수 없는 인생이기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헤세는 평생을 고뇌했다. 이편의 삶을 살아도 저편의 삶을 살아도 완전할 수 없는 생의 아이러니를 해결할 길은 조화로운 세상의 삶이었다. (이 나라의 불완전한 정치 현실도 조화가 절실하게 필요한 것처럼) 필자는 주인공 요제프 크네히트의 순조로운 성공을 읽어가면서도 무엇인가 대단한 비극적 반전이 일어날 기미가 느껴져 이 소설을 손에서 뗄 수 없었다. 요제프 크네히트의 정신세계와 현실이 조화를 이루려고 세상에 첫발을 내디딘 날 죽음을 맞는 소설의 결말이 오랫동안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 헤세는 요제프 크네히트의 인생 결말을 왜 이렇게 허망하게 맺었을까. 이 점이 우리가 생각해 볼 숙제다. 완전한 것도 영원한 것도 없다. 인생에서 비법이란 것은 없다고 했다. 요제프 크네히트가 최고 유희 명인의 안정된 지위와 명예를 던지고 세상 속에 들어가 소박하고도 새로운 삶을 살기를 시도했다는 사실만이 가슴속에 명징하게 새겨진다. 여기서 성경 한 줄을 인용하지 않을 수 없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내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라.(마태복음) 요제프 크네히트는 비록 죽음을 맞이했지만, 소금이 되려고 세상에 나간 게 아닌가? 헤세 역시 짠 소금 맛을 우리에게 선물한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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