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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두 선생에게 길을 묻다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24년 12월 30일(월) 19:13
↑↑ 서병진 전 경주여고 교장
ⓒ 경북연합일보
“고인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 못 뵈. 고인을 못 뵈도 녀던 길 알페 있네. 녀던 길 알페 있거든 아니 녀고 엇뎔교.” 사랑하는 정사제생(精舍諸生)의 지학(志學)을 북돋우기 위해 읊은, 퇴계 선생의 도산십이곡 중 제9곡이다. 고인의 길이 현대(現代)를 벼리는 길잡이다.
갑진년을 마무리하고 을사년에 들어선다. 청룡의 해에 부푼 가슴으로 출발했는데, 부끄럽고 서글프게 매듭지어졌다. 아주 많이 실망이다. 을사년도 걱정스럽다.
120년 전. 을사(1905)년 11월 17일에 일제의 강압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됐다. 일제가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고, 식민지에 준하는 수탈을 자행한 해다.
이래저래 마음이 잡히지 않아 머리를 식힐 겸 길을 나섰다. 古人이 걸어간 삶의 길을 찾아 나선다는 핑계로. 덕유산과 지리산 자락의 남계서원에서 일두(一蠹) 선생에게 길을 묻고, 선비정신을 배울 요량이다.
좀 거창하게 길을 묻고 찾는다는 핑계를 대기는 했지만, 몇몇 지인들과 훌훌 하루 일상을 떠난 셈이다. 마음을 털어보려고 출발했지만, 재선충으로 붉게 마른 소나무들이 우리 현실 같아 아프다. 잎 떨어진 감나무에 차갑게 꽁꽁 얼었을 감이 발갛다. 까치밥이라기엔 좀 많다. 높은 가지에 달려 따기가 힘들고, 인건비가 나올 것 같지 않아 그냥 두었으리라. 그래도 눈길을 끄는 빨간 아름다움이다. 남겨둔 여유(餘裕)의 고운 아름다움에 위안을 받는다. 참 곱다.
남계(濫溪)에서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을 만나다. 일두 선생의 학행(學行)의 고갱이는 인간다운 삶의 질을 높이는 것. 知行一致의 선비정신이다. 여창(汝昌)이란 이름. 너여(汝) 창성할 창(昌). “너(汝)는 家門을 昌盛하게 만들 인물”이란 뜻이다. “사람이 이름을 귀하게 하는 것이지, 이름이 사람을 귀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 여창이라 이름을 지어준 작명가(명. 사신)의 말이다. 그렇다 사람이 이름을 빛내는 것이지 이름이 사람을 빛내는 것이 아니다.
범은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 가죽이 범을 남기고 이름이 사람을 남기는 것이 아니다. 왜 사람들은 작명가를 찾고 무속인(巫俗人)을 찾을까? 여말(麗末) 왕조의 종말을 재촉한 신돈의 사례가 있지 않은가. 예나 지금이나 자신의 힘이 아닌 초능력에 의존하면 반드시 탈이 생긴다. 창피스럽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할 일이다.
선생의 호(號)가 일두(一蠹)다. 한 마리 좀 벌레. 宋나라 程伊川의 “天地間一蠹”에서 가져온 一蠹다. 창해일속(滄海一粟)의 작은 존재이면서 그냥 벌레가 아니라 책벌레가 되겠다는 의지가 담겼다. 책 속에서 선현(先賢)의 바른 삶의 길을 찾고, 사람을 존중하는 도리를 찾고자 하는 의지였을 것이다. 선생은 理를 중시한 주리파(主理派). 선악이 천리(天理)에서 나오므로,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人欲)을 막아야 한다고 역설. 지행일치의 삶을 살았다.
‘남계’는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의 이름. 남덕유산에서 발원해 화림동, 심진동 계곡을 흘러온 물이 서원 앞으로 흐른다. 욕심 없는 삶의 의지가 담긴 풍영루(風詠樓)가 우뚝하다. 농부가 지은 곡식, 공인(工人)이 만든 물건, 군인이 지키는 나라에 살면서 베풀지 못하면 한 마리 좀 벌레 같은 존재이니, 좀 벌레가 안 되려고 역설적으로 ‘일두’를 택했단다.
권력 때문에 완전 난리법석이다. 온전한 눈빛의 정치인을 보기 어렵다. 입에는 마구 독설이다. 살기(殺氣) 어린 눈빛과 독설의 잔치를 피해 잠시 일두 정여창 선생을 만나 보았다.
경북연합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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