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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산 지역의 문화유산 ③
정석준 신라문화전문해설사, 수필가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23년 04월 27일(목)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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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경북연합일보 | 남간사지는 현재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고, 다만 남간사지 석정(돌우물)과 당간지주만 남아 있을 뿐이다. 남간사지 ‘석정’은 땅을 파고 내부를 돌로 짜 올린 다음 화강암의 다듬은 자연 석재로 우물의 외벽을 짜 맞추었는데, 위쪽은 남북으로 합쳐지는 2매의 다듬은 돌로 원형틀을 덮어 마감했다. 분황사의 석정이나 재매정과 같은 통일 신라 우물 형태를 잘 보여 주고 있는데,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13호로 지정됐다. ‘당간’은 절에서 불교 의식을 할 때 부처와 보살의 공덕을 기리거나 마귀를 물리칠 목적으로 달았던 ‘당’이라는 깃발을 말하며, 이 당간을 받쳐 세우는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남간사지 당간지주는 동서로 70cm의 간격을 두고 마주보고 서 있는데, 바같쪽 옆면 모서리 윗부분에만 모죽임(角)이 있다. 안쪽면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해 깍아낸 간구(杆溝)가 있는데, 특히 절상의 안쪽면에는 여느 당간지주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십(十)‘자형 간구가 있다. 이 당간지주는 당간을 고정시키는 간구와 간공, 바같쪽 옆면 모서리의 모죽임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장식이 없는 소박하고 간단한 모습의 당간지주로 보물 제99호로 지정됐다. ◇창림사지(昌林寺址) 삼층석탑 : 창림사지 삼층석탑은 나정의 안쪽 서남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창림사가 창건되기 이전에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께서 이곳에 최초의 궁궐을 조성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창림사지에는 궁궐의 자취는 찾아볼래야 찾아 볼 수가 없고, 절터로서도 너무나 흐트러져 버렸다. 절터의 석물들은 인근의 민가에서 건축자재로, 또는 분묘의 석물로 사용하기 위해 가져 가 버려, 지금은 일부의 토단과 석단만 남아 근근이 이곳이 절터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창림사터 윗쪽에 삼층석탑이 우뚝 서 있다. 이 탑은 1824년 사리장엄구를 도굴하려던 자에 의해 도괴됐는데, 이 때 조탑 사실이 기록된 창림사 무구정탑원기(昌林寺 無垢淨塔願記) 동판이 나왔다. 이를 추사 김정희가 그대로 묘사해 두었는데, 이 기록에 의하면 창림사지 삼층석탑은 문성왕 17년(855년)에 세운 탑이라고 한다. 현재 탑의 높이는 7m로, 남산 일대에서는 가장 크고 우람한 탑이다. 1979년에 이리저리 넘어져 있던 탑의 부재들을 모아 복원했는데, 2층과 3층 몸돌, 그리고 기단부의 절반 정도를 새로 다듬어 끼워 넣었다. 이 탑은 2층 기단 위에 세워진 3층 석탑인데, 위층 기단에는 팔부신중(八部神衆)이 새겨져 있다. 이처럼 팔부신중을 기단에 새긴 예는 남산의 동쪽에 있는 남산동 쌍탑 중 서탑에서도 볼 수 있으니, 남산을 부처님 나라로 여기던 신라 시대에, 남산의 해뜨는 쪽과 해지는 쪽에 같은 의도로 탑을 세운 것으로 추측된다. 1층 몸돌에는 사방에 문 모양이 새겨져 있고 문고리도 쌍으로 새김돼 있어 부처님의 영(靈)이 드나드는 문임을 나타내고 있다. 이 탑이 무너져 있던 북쪽 골짜기에서 탑 위 상륜부의 일부인 앙화(仰花)가 발견돼 지금 경주박물관에 진열돼 있다. 여기에는 8개의 꽃잎이 벌어져 있는데, 사방에는 부처님 모습을 새겼고, 네 귀퉁이에는 날개를 활짝 편 극락조(極樂鳥)를 새긴 화려하면서 멋들어진 모습이다. 상층 기단부에 새겨진 팔부신중은 지금 네 개만 남아있다. 팔이 여덟인 괴상한 모습을 한 지옥의 왕 아수라, 사자탈을 쓰고 놀이를 주관하는 건달바, 오른손에 금강저라는 무기를 들고 악을 쳐부수는 천(天), 힌두교에 근원을 둔 뱀나라의 왕 마후라가, 이렇게 넷이다. 모두 구름을 타고 천의(天衣) 자락을 날리면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모습인데, 풍성한 양감과 힘이 느껴지는 뛰어난 조각 솜씨이다. 탑 아래쪽 소나무 숲 속에 아주 이색적인 쌍두귀부가 있다. 비신도 없어지고 거북의 머리도 다 떨어져 나가고 없지만, 살이 통통히 오른 동글동글한 앞발이며 서로 다른 쪽을 향하고 있는 모습들이 무척 귀엽다. 이 귀부 위에는 신라의 명필 김생이 쓴 비석이 있었다고 한다. 원나라의 학사 조명부가 창림사비의 글씨를 평한 글 일부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21권 경주부에 “이 글은 신라의 스님 김생이 쓴 창림사비인데, 자획이 깊고 법도가 있어 비록 당나라의 이름 난 조각가라도 그보다 더 나을 수는 없다. 옛말에 ‘어느 곳엔들 재주 있는 사람이 나지 않았으랴’했더니 진실로 그러하구나”라는 기록이 있는데, 진실로 그러하다. 동경잡기 권3 오산기승(鰲山奇勝)에는 창림사비문과 관련된 서거정의 시가 소개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바닷가에서 금오산을 바라보면 좋기도 하나 풍류와 문물 모두 옛날과 다르다 웅장했던 저택들 터만 남아 있는데 냉이풀이 우거졌고 이름났던 동산에는 주인도 없이 끊어진 다리만 위태롭구나 누가 쇠피리를 신이 나서 부르는가?
몇 년 전만 해도 이곳 창림사지는 소나무 숲 언덕으로 변해버린 여러 곳에서 건물의 주춧돌로 쓰였을 부재들이 여기저기서 나뒹굴고 있는 것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고, 쌍두귀부 옆과 법당 터, 그리고 삼층석탑 바로 앞에도 무덤이 들어서 완전히 무덤터로 변해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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