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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는 어떤 종교인가? ①
정석준 종교연구가, 수필가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23년 03월 30일(목)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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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경북연합일보 | 천도교는 우리나라에서 자생한 민족종교이며, 그 발상지가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이다. 금년이 천도교 창도 164년으로, 다가오는 4월5일은 최제우가 용담정에서 득도한 날이다. 이에 본고(本稿)에서는 천도교가 발생한 시대적 배경은 무엇이며, 천도교의 핵심사상은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한다. 천도교의 창시자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1824~1864)이 태어난 당시의 국내외 사정은 극도의 혼란과 불안 속에 놓여져 있었다. 아편전쟁 이후 중국에 대한 열강의 침략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기만 했고, 광동사건(廣東事件)ㆍ영불군(英佛軍)의 북경침입 등 대사변이 연달아 일어났으며, 그러한 소식들은 우리나라에도 속속 전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다 국내사정 또한 마찬가지로 혼란에 빠져 헤어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세도정치의 폐해가 날로 심해져 정치는 문란할 대로 문란해 졌다. 3정(三政)의 누적된 폐단에 의해 민생은 도탄에 빠졌는데, 거기에다 계속된 흉년에다 괴질마저 창궐하니 민란은 3남(三南) 지방에서부터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이러한 혼란에 부채질을 가한 것은 사상의 혼란이었다. 즉 서교(西敎)라고도 불리는 천주교의 유행과 그 교도들에 대한 관(官)의 지나친 탄압이 그것이었다. 전통적인 우리들의 사상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천주교의 포교와 교세의 확충은 확실히 하나의 충격이며 동요의 요인이 될 만 했다. 수운은 이러한 정치적 불안과 사회적 모순, 그리고 사상적인 이질감으로 인하여 사회가 극도로 동요하던 시대였다. 그의 아버지 옥〔근암〕은 유학에 능했다고 하나 벼슬은 하지 못했다. 두 아내를 사별하고 후사를 두지 못해 고심하던 중, 마침 이웃 마을에 살던 과부 한씨를 뒤늦게 맞아 그리던 아들을 보니 이때 근암공의 나이 63세였다. 그러나 한씨 부인도 6년 만에 사별하고 만다. 따라서 모친없는 수운은 할아버지 같은 홀아버지 밑에서 성장하게 된다. 나이가 70이 넘은 근암은 수운의 나이 13세 때 울산 출신의 박씨와 결혼시키고 자신은 4년 뒤에 황망하게 세상을 떠난다. 수운은 어려서부터 총명이 뛰어나 아버지로부터 경서(經書)를 배웠지만, 서자로 태어났으므로 그 재능을 펼 길이 없었다. 갖가지 장사도 하고, 서당에서 글을 가르치기도 하면서 청년 시절을 어렵게 보냈다. 그의 나이 30세쯤 되자 자신에게 닥친 어려움은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가 당면한 인류 문명의 총체적 붕괴에서 오는 것이라 믿고 ‘나라를 살리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며 인간을 두루 구할 수 있는(輔國安民 廣濟蒼生)’ 길을 찾아 구도의 길을 떠났다. 주유(周遊)하는 동안 어떤 알 수 없는 승려로부터 을묘천서(乙卯天書)라는 이서(異書)를 받고 3일 만에 터득하는 일이 있었다. 수운은 전통 종교인 유·불·선이 이제 기운을 다 해 새로운 시대에 정신적 지주가 될 수 없고, 서학인 천주교도 그 공격성이나 흑백논리로 보아 세상을 구할 수 있는 도가 못 된다고 확신하였다. 그는 이 붕괴되는 선천문화를 개벽할 수 있는 새로운 도를 찾으려 했던 것이다. 전국을 두루 다니고 다시 고향 경주의 구미산 밑 용담으로 돌아와 원하는 대도를 얻기까지는 그 산을 떠나지 않기로 작정하고 구도에 정진한다. 드디어 1860년 4월5일, 37세 되던 해 결정적인 종교체험을 한다. 갑자기 마음이 차고 몸이 떨리고 정신이 아득해 지면서 한 음성을 듣게 되었다. “두려워 말고 저어하지 말라. 세상 사람이 나를 상제라 이르나니,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하고, 이어서 “너를 세간에 내어 사람에게 이 법을 가르치게 하나니 의심치 말고 의심말라.”고 했다. 이렇게 시작된 한울님과의 문답 ‘강화(降話)’가 거의 1년 동안 계속되었는데, 이때 이른바 무극대도(無極大道)를 받는다. 그 1년은 그가 체험하여 깨달은 사실을 되새기며 체계화하는 기간이기도 하였다. 진리를 널리 펴는 일, 곧 포덕(布德)을 위한 준비 기간인 셈이다. 득도(得道) 다음 해 6월, 포덕(布德)을 시작했다. 스스로 다닐 필요도 없이 그의 득도에 대한 소문이 퍼져 찾아오는 사람이 그치지 않았다. 그는 한울님을 소개하고 인간이 다 같이 한울님을 모시고 있으므로 인간은 모두 동등하다고 가르쳤다(수운은 자기 집의 노비를 해방시키고, 노비 중에 하나를 딸로 삼고 다른 하나는 며느리로 삼는 등 신분차별 폐지의 평등주의를 몸소 실천하였다). 양반·상인(常人)의 계급과 서열이 엄격하던 사회에서 이런 가르침은 실로 혁명적인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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