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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세기’가 들려주는 신라사의 진실 ③
정석준
신라문화해설사. 수필가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22년 10월 06일(목)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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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경북연합일보 | 사다함에 대한 기록은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삼국유사』에도 나오고 『화랑세기』에도 나온다. 그런데 『화랑세기』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없는 새로운 이야기가 나온다. 『화랑세기』에는 미실과 사다함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고 한다. 미실은 전쟁에 나가는 사다함을 위하여 송출정가(送出征歌)를 직접지어 노래하며, 이별을 아쉬워했다.
바람이 분다고 하되 임 앞에 불지 말고 물결이 친다고 하되 임 앞에 치지 말고 어서 빨리 돌아오라 다시 만나 안고보고 아흐, 임이여 잡은 손을 차마 물리라뇨.
사다함은 기병 5천명을 이끌고 대가야 국경선의 성문인 전단량을 기습해 큰 전과를 올렸다. 사다함이 대가야 정벌에 큰 공을 세우고 돌아와 보니 미실은 이미 남의 아내가 되어 있었다. 사다함은 청조가(靑鳥歌)를 지어 부르며 슬픔을 달랬다.
파랑새야 파랑새야 저 구름 위의 파랑새야 어찌하여 나의 콩밭에 머무는가 파랑새야 파랑새야 너 나의 콩밭의 파랑새야 어찌하여 다시 날아들어 구름 위로 가는가 이미 왔으면 가지 말지 또 갈 것을 어찌하여 왔는가 부질없이 눈물짓게 하며 마음 아프고 여위어 죽게 하는가 나는 죽어 무슨 귀신될까, 나는 죽어 신병되리 (미실)에게 날아들어 보호하여 호신(護身)되어 매일 아침저녁 전군 부처 보호하여 만년 천년 죽지않게 하리라.
여기서 파랑새(靑鳥)는 물론 미실을 가리킨다. 사다함은 노래로써 자신의 사랑을 승화하려 했지만 연모의 정을 달래지 못하고 끝내 상사병으로 죽고 말았다. 『삼국사기』 <열전 사다함조>에는 ‘사다함이 처음에 무관랑과 생사를 같이하는 벗이 되기로 약속했는데, 무관랑이 병들어 죽음으로 매우 섧게 울다가 7일 만에 자신도 죽으니 그때 나이 열일곱 살이었다’고 적고 있으나 『화랑세기』는 사다함의 진짜 사망원인이 상사병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무관랑의 죽음에 대해서도 『화랑세기』는 병들어 죽은 것이 아니라 금진낭주(진흥왕의 후궁, 사다함의 모)를 몰래 만나기 위해 밤에 궁장(宮墻)을 넘다가 구지(溝池, 해자)에 떨어져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무관랑이 넘었던 궁장은 월성의 담이고, 그가 빠졌던 구지는 월성 밖의 해자(垓字)라고 부르고 있는 당시의 구지였던 것이다. 1985년 발굴을 통해 처음 밝혀진 월성의 해자는 화랑세기에 나오는 것과 같이 구(溝)와 지(池)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4. 진지왕은 미실과 그 추종자들에 의하여 폐위되었다 진지왕은 진흥왕의 둘째 아들이다. 맏아들 동륜태자가 보명궁(寶明宮, 진흥왕의 후궁)의 담을 넘다가 개에게 물려 죽는 바람에 진흥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런데 진지왕은 왕위에 오른 지 4년 만에 폐위되고 말았다. 진지왕의 폐위에 대해서 『삼국사기』에는 한마디의 언급도 없으나 『삼국유사』에는 ‘나라를 다스린 지 4년 만에 정치가 어지럽고 기강이 문란해져서 나라사람들이 왕을 폐하였다’고 적고 있다. 여기서 나라사람이란 어떤 집단(세력)을 가리키는 것인지 지금까지 미스테리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화랑세기』가 발견됨으로서 이 문제의 해답을 찾을 수가 있었다. 『화랑세기』 <7세 풍월주 설화랑 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진지대왕은 미실 때문에 왕위에 올랐는데, 색을 밝혀 방탕하였다. 사도태후가 걱정을 하다가, 이에 미실과 폐위할 것을 의논하였다. 노리부공으로 하여금 행하도록 하였다. 노리부공은 곧 사도의 오빠이다. 미실의 남편인 세종과 더불어 장차 대사를 일으키려 할 때, 문노의 도(徒)가 불복할까 염려하여 태후의 명령으로 두 개의 도를 합쳐 하나로 만들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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