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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어떤 종교인가? (4)
정석준 종교연구가, 수필가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22년 05월 12일(목)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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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경북연합일보 | 자연계는 에너지와 질량, 이 두 가지로 구성돼 있는데, 고전 물리학에서는 에너지와 질량을 각각 분리해 놓고 보았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등가원리에서는 결국 에너지가 곧 질량이고 질량은 곧 에너지이다. 즉 질량과 에너지는 서로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전에는 에너지에서는 에너지 보존법칙, 질량에서는 질량불변의 법칙을 가지고 자연현상의 모든 것을 설명하였는데, 요즈음에는 에너지와 질량을 분리하지 않고 에너지 보존법칙 하나만 갖고 설명한다. 질량 전체가 에너지로 나타나고, 에너지 전체가 질량으로 나타나는 이런 전환의 전후를 비교해보면 전체가 서로 전환되어서 조금도 증감이 없다. 곧 부증불감(不增不減)이다. 불생불멸이니 마땅히 부증불감이다. 불교의 근본 원리인 불생불멸이 상대성이론에서 출발하여 현대 원자물리학에서 과학적으로 완전히 증명된 것이다. 부처님은 우주의 광대무변(廣大無邊)함에 관해서도 말씀하고 계시는데, 『금강경』에서 수보리에게 “갠지스강에 있는 모래만큼의 갠지스강들이 있고, 이 갠지스강들에 가득찬 모래 수만큼의 부처의 세계가 있다.”라고 하였으며, 『법화경』에서는 우주를 ‘5백 천만억 나유타 아승지의 3천 대천세계’라고 묘사하고 있다. 나유타란 말은 구사론에 의하면 51개의 0이 붙은 숫자이며 아승지란 산수로 표현할 수 없는 가장 많은 수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나유타 아승지의 삼천대천세계에 대한 풀이는 다종다양하나 최근 천문학에서 밝혀낸 바와 비교해 볼 때 상당한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 은하계 우주의 역사는 약 2백억 년, 지름이 약 10만 광년(1광년은 초속 약 30만㎞의 빛이 1년 걸려서 진행하는 거리인 9조 4천 670억㎞의 거리임), 중심부의 두께는 약 1만5천 광년 정도의 볼록렌즈 꼴로, 3천억 개 가량의 항성과 막대한 성간 물질로 이루어진 대집단으로 소용돌이 모양의 성운이다. 태양계는 은하계 중심으로부터 약 2만 7천 광년 떨어진 소용돌이의 한 끝에 위치하고 있으며 은하계 우주 천체는 약 2억 년을 주기로 자전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은하계 외에 우주에는 안드로메다 대성운 같은 섬 우주들은 은하계 우주와 전적으로 동일한 섬 우주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이 같은 섬 우주들이 현재 밝혀진 것만 해도 3천억 개 이상이라는 학자들의 보고다. 이 같은 숫자도 미국의 팔로마산 천문대의 2백인지 망원경으로 볼 수 있는 20억 광년 이내의 숫자이며 20억 광년 밖에는 무수한 섬 우주의 존재를 가정할 때 우주가 얼마나 큰 것인가는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고도 남음이 있다. 불교의 우주관은 과학이 발달하기 이전에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들렸으나 20세기에 와서 자연과학 특히 천체물리학이 발달함에 따라 사실임이 증명되기에 이르렀다. 일곱째, 불교는 관용의 종교이다. 나란다에 우바리라는 장자(長者)가 있었다. 그는 자이나교의 교조 나타붓다의 유명한 재가 신도였다. 한때 나타붓다는 그를 특별히 부처님에게 보내 업(業)에 관한 논쟁으로 부처님을 누르도록 했다. 그것은 업에 관한 부처님의 견해가 그와 다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대와는 정반대로 논쟁 끝에 우바라는 부처님의 견해가 옳고 그의 스승의 견해가 그르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부처님에게 그를 재가신도로 받아들여 주도록 간청했다. 그러나 부처님은“당신같이 잘 알려진 인물에게는 신중한 고려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시며 서두르지 말고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것을 권했다. 우바라가 다시 그의 소망을 얘기했을 때 부처님은 그에게, 모시던 옛 스승을 계속 존경하고 보필하도록 권유했다. B.C. 3세기경, 이러한 이해와 관용의 고귀한 모범을 따랐던 아쇼카라는 인도의 위대한 불교 황제는 그의 광대한 제국 내의 모든 종교들을 존중하고 후원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비석의 칙령에서 황제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자신의 종교만을 존중하고 다른 종교를 비난하지 말라. 여러 가지 이유로 하여 다른 이의 종교도 존중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종교를 성장시킬 수 있으며 또한 다른 이의 종교에도 도움을 주는 것이다. 행동이 그와 같지 않으면 자신의 종교의 무덤을 파는 것이며 또한 다른 이의 종교에 해를 끼치는 것이다. 자신의 종교만을 내세우고 타인의 종교를 비난하는 사람은 누구나‘나는 내 종교를 찬양하리라’고 생각하면서 그와 같이 행동한다. 그러나 반대로 그러한 행동은 자신의 종교에 중대한 해를 미치게 한다. 그러므로 화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모든 다른 종교의 교의에도 귀 기울이도록 하라.” 이러한 이해와 관용의 정신은 처음부터 불교문화의 가장 소중한 이념이었다. 불교가 2,500여 년에 걸친 포교의 과정에서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았고, 어떠한 박해의 사례도 없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정신 때문이었다. 서양의 종교인 기독교도 사랑과 평화를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성경 자체가 가지고 있는 배타성을 극복할 수가 없다. 유일신을 믿는 종교의 배타성은 종교의 본질적 부분의 하나다. 여호와는 모세에게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불관용을 선언했다. 교회의 역사는 피로 얼룩진 역사이다. 십자군 전쟁이나, 신·구교간의 전쟁은 기독교의 역사의 수많은 피흘림 가운데 두드러진 예일 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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