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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황사의 다섯 가지 신비로운 이야기
강병찬 본지 취재국장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22년 02월 06일(일)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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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경북연합일보 | 경주 분황사(芬皇寺) 경내에 들어서면, 모전석탑(模塼石塔)이 탐방객들을 반갑게 맞는다. 분황사는 고풍이 극치이고, 모전석탑은 위풍이 당당하다. 그곳에는 고찰의 고즈넉과 석탑의 위용만이 아니다. 분황사 모전석탑은 신비로운 이야기를 감실(龕室) 속에 감추고 있다. 모전석탑 기단 귀퉁이에는 돌사자가 탑을 옹위하고 있다. 감실은 1층 탑신 중앙에 있다. 감실로 들어가는 돌문 좌우에는 금강역사(金剛力士)가 신성한 처소를 겹겹이 지키고 있다. 그러나 인문학을 사랑하는 탐방객들은 항상 열려 있는 돌문 안으로 당당히 들어가 신라시대로 시간여행을 떠날 수 있다.
◇첫 번째 : 천재들의 대경연장 신라 제27대 선덕여왕은 재위 3년(서기 634년)에 연호(年號)를 인평(仁平)으로 하고, 분황사와 모전석탑을 세웠다. 그 후 분황사에는 나라를 빛낸 위인들이 속속 등장해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수도자의 표상인 자장법사(慈藏法師)는 분황사 주지였다. 그는 선덕여왕에게 삼국통일과 만국평화를 발원하는 황룡사구층탑 창건을 건의했고, 삼국통일은 이룩됐다. 불교 사상가이자 사회지도자인 원효대사(元曉大師)는 분황사에 오랫동안 거주하면서 화엄경소(華嚴經疏)를 비롯한 수많은 책을 쓰고, 민중불교를 설파했다. 그의 아들 설총(薛聰)은 그곳에서 이두(吏讀)를 집대성했다. 그는 도덕정치를 주창하며 ‘화왕계(花王戒)’를 썼다. 분황사의 천재 중에는 예인(藝人)도 줄을 이었다. 솔거(率居)가 분황사에 그린 관음보살상은 신화로 변했다고 한다. 천하장인인 강고내말(强固乃末)은 구리 30만 6천 700근의 장엄 약사여래불을 조성했다. ◇두 번째 : 감추어진 보물창고 분황사에는 국보 제30호 모전석탑을 비롯해 석정, 석조, 초석, 석등, 대석, 사경, 화쟁국사비대, 당간지주(幢竿支柱)가 오롯이 남아 있다. 모전석탑 본체 외에도 금강역사와 돌사자가 신라 조각의 우수성을 뽐내며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1915년 모전석탑을 해체·수리하면서 석함(石函) 속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는 경주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고대 탑에서 발견된 공양품 중 가장 많은 종류와 수량을 자랑한다. 바깥 모양은 팔각이고, 내부는 원형인 석정(石井)은 신라 우물 가운데 가장 크고 우수하다고 평가된다. ‘삼룡변어정(三龍變魚井)’으로도 불리며, 신라의 호국과 자주의 의지를 드러낸다. 분황사 당간지주는 희귀한 귀부형간대석을 갖춘 것으로 최근 보물로 지정됐다. 원효대사를 기리는 화쟁국사비는 고려 숙종(1101년) 때 세워졌고, 현재는 비대만 남아 있고, 추사 김정희가 비대에 새긴 글씨가 희미하게 남아 있다. ◇세 번째 : 모전석탑 원형 찾기 모전석탑의 원형이 7층인지 9층인지는 불확실하다. 남은 3개 층만으로도 이 정도 규모라면, 원형의 위용은 참으로 장엄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모전석탑의 복원은 쉽지는 않다. 역사적·과학적 고증을 통해 원형이 복원된다면, 우리 문화재 과학의 발전상을 가늠하는 잣대가 될 뿐 아니라 문화재 가치회복의 시금석이 된다. 모전석탑이 복원된다면, 외견상 어색함은 거의 없을 것이다. 원래의 부자재가 전량 사용돼 원래의 방식대로 복원되기 때문이다. 부자재들은 현재 분황사 안쪽 담장 바깥면에 야적돼 있다. 부자재들을 덮어둔 천막이 모조리 헤어진 상태여서 추가 손실이 우려된다. 신라인들이 정성을 기울여 다듬은 안산암들이 임진란 때 왜군들이 무너뜨린 후 여전히 방치돼 있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네 번째 : 한국 인문학의 요람 원효대사와 요석공주(瑤石公主) 사이에 태어난 설총은 인문학적으로 주목되는 인물이다. 설총이 한글의 모태인 이두 즉 향찰을 고안했기 때문이다. 설총은 어릴 때부터 분황사에서 원효대사로부터 훈육을 받았다. 원효대사의 훈육은 종교, 예법, 철학, 정치, 사회는 물론 언어, 문학에 이르기까지 설총을 당대 최고의 천재로 만들었다. 효심 또한 지극했다고 한다. 신라는 민족의 자주성이 강조되는 사회였고, 불교 사찰에서는 불경을 해독하면서 한자 원문에다 이두를 덧붙여 사용했다. 설총은 선각자적 관점에서 이두를 체계화해 우리 국민이 쉽게 이해하고 활용하도록 최초의 우리 문자를 만든 것이다. 설총은 이두만으로 불경을 해독하고 낭송했다고 한다. 따라서 설총이 대한민국 인문학의 아버지가 되고, 분황사가 대한민국 인문학의 요람이 된다. ◇다섯 번째 : 심금을 울리는 모정 신라인들은 분황사에서 체계화된 향찰을 무척 아끼고 사랑해 널리 애용했다. 그들은 향찰로 쓴 시에 곡조를 붙인 ‘향가(鄕歌)’를 지어 애창했다. 신라 향가는 삼국유사에 단 14편만이 전해지는 소중한 기록문화유산이다. 고구려와 백제의 유물에서는 향찰이나 향가가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면 신라의 민족 주체성이 가장 투철했음이 증명된다. 도천수대비가(禱千手大悲歌)는 분황사를 배경으로 쓰인 향가이기에 그 의미가 더욱 깊다. 삼국유사에 “한기리(漢岐里)의 여인, 희명(希明)의 아들이 생후 다섯 해 만에 갑자기 눈이 멀게 되자, 희명이 분황사 좌전(左殿)에 있는 천수대비의 벽화 앞에서 아이에게 이 노래를 부르게 해 마침내 눈을 뜨게 됐다.”라는 연기설화(緣起說話)가 향가와 함께 적혀 있다. 이 향가에 나타난 자식에 대한 부모의 가없는 사랑이 듣는 이의 심금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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