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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포석정(鮑石亭) 애가(哀歌)
포석정이 신라의 이궁이자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며 제(祭)를 행하던 신성한 곳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22년 01월 20일(목)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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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경북연합일보 | | 칼럼=강병찬 본지 취재국장
경주 오릉에서 남산으로 가다 보면, 초입인 나정(蘿井)에서 1km 남짓 떨어진 곳에 포석정(鮑石亭, 사적 제1호)이 있다. 포석정은 남산의 정상부에서 길게 뻗어 나온 포석골의 맨 아래 평평한 곳에 널찍하게 터를 잡았다. 정상부로 이어지는 넓고 완만한 등산로 주변에는 솔숲이 울창하다. 포석정은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된 경주 남산에서 이름, 역사, 경관을 견줘 그 신비로움이 비길 데가 없다. 그러나 요새 관광 취향이 화려하고 거창한 곳 위주로 바뀌면서 포석정의 이미지는 예전보다 상당히 퇴색됐다. 그런데 최근 문화계에서는 포석정이 신라의 이궁이자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며 제(祭)를 행하던 신성한 곳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했던 곡수거(曲水渠)는 당나라의 정원을 참고해 만들었다고 한다. 당나라 사신들을 위한 연회를 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정궁인 반월성에서 외교적 연회를 자주 여는 것은 안보와 국격 차원에서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기 때문이다. 포석정이 신라 이궁(離宮, 행궁 혹은 별궁)이라는 최근의 인식은 그 일대에 대한 1998년도 발굴조사가 뒷받침한다. 발굴조사 당시 그곳에서는 제사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신라시대의 그릇들이 상당히 출토돼 세간을 놀라게 했다. 문헌상으로 동국통감(東國通鑑)에는 포석정을 ‘반월성 남쪽에 있었던 신라 왕실의 이궁(離宮)’으로 분명히 적혀 있다. 그런데도 포석정이 신라의 왕족과 귀족들이 궁녀들을 데리고 사시사철 유상곡수연을 즐기던 환락의 장소라는 고정관념은 변하지 않고 있다. 각종 유물이 출토돼 실체가 드러났고, 문헌이 뚜렷이 남아 있는데도 유적의 참된 의미가 재정립되지 않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포석정은 63개의 돌을 이어붙인 ‘전복 모양의 돌 홈을 이어붙인 수로’만이 아니다. 이제까지 보존돼 온 신라시대의 돌 홈이 귀중한 문화재인 것은 사실이지만 ‘돌 홈 수로’, 이른바 ‘곡수거’는 이궁을 위한 부대시설일 뿐이다. 정자(亭子) 역시 이궁을 최대한 좁혀서 격하한 표현이다. 부대시설로써 주된 시설과 기능을 대체해 장소적·개념적 정의를 내리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신라 이궁은 제사, 방어, 휴양, 연회 등 국가와 왕실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곳으로 추정된다. 포석정은 남산의 장엄한 능선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고, 포석골에는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흐르는 천혜의 요새다. 화랑세기에는 포석정을 ‘포석사(鮑石祠)’로 일컫는 것으로 보아 열사(烈士)를 모신 사당이며, 귀족 자제들의 혼례 장소로 사용된 성소가 분명해 보인다. 신라 이궁의 규모는 지금보다 훨씬 넓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민가가 들어서 있는 포석정지 주변을 폭넓게 조사해보면, 방어를 위한 높은 담장(혹은 성벽), 해자(垓子), 전각 등을 비롯해 병장비와 유골 같은 흔적이 추가로 나올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문화재 당국은 이제라도 포석정을 ‘신라 돌 홈 보존’ 수준에서 벗어나 ‘신라 이궁 복원’ 차원에서 그 일대를 대대적으로 재조사해야 한다. 그 결과를 토대로 포석정에 대한 정의를 ‘신라 이궁’으로 바로잡고, 대한민국 제1호 사적의 참된 가치를 재평가해야 한다. 포석정의 참된 의미를 확인하고 나면,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환락을 즐기다가 신라가 패망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경애왕은 후백제군의 침략 소식이 전해지자 후고구려에 지원군을 요청해 놓고서 애타게 기다리는 중이었다. 경애왕(景哀王, 재위 924∼927)에 이어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敬順王, 재위 927~935)도 자신에게 왕위를 넘겨준 견훤을 배신한 후 어쩔 수 없이 고려에 항복해 신라의 1천 년 종묘사직(宗廟社稷)을 송두리째 바쳤다는 부분도 다른 해석이 나온다. 경순왕은 고려에 불리한 위치에서 굴복하거나 조건 없이 항복한 게 아니라 대등하게 두 국가의 통합을 이뤘다. 국가 통합으로 신라 왕족은 고려 왕실과 인척 관계를 겹겹이 맺었다. 더 나아가 군부 위주 정권이었던 고려 조정에 신라 관료들을 대거 참여시킴으로써 신권을 장악해 권력을 분점했다. 고려 인종 때 삼국사기를 쓴 경주 출신 김부식(金富軾, 1075~1151) 형제의 경우를 보면, ‘동경(경주)파’가 ‘서경(평양)파’인 묘청(妙淸)을 진압하고, 조정의 실권을 거머쥐었다. 포석정의 참된 의미를 알고 나면, 경애왕은 포석정으로 피신했으나 적에게 붙잡혔고, 적장 앞에서 위엄을 잃지 않고 장렬하게 자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애왕비도 왕을 따라 스스로 목을 맸다. 더불어 후삼국 통일의 과정과 의의도 후삼국 통일을 향한 국가대통합으로 이해된다. 천년왕국 신라의 멸망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그날 참담한 비극의 역사, 포석정 애가(哀歌)는 새롭게 써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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