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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리의 삶과 문학 (2)
정석준 동리목월문학관 상주작가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21년 11월 25일(목)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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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경북연합일보 | 그의 또 다른 대표작 「무녀도」에서도 서구 기독교와 한국의 토착 샤마니즘의 대결을 통해 세계관적, 문화적 이념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작가 자신은 비평이나 실제의 행동에서 인간주의와 동양주의를 지지하고 있음에도 소설에서는 어느 한편의 손쉬운 선택을 거부하고 그 두기지의 영원히 화해할 수 없는 대립적 관점을 객관화하고 있다. 이 같은 작가적 진지성이 김동이 소설의 탁월함을 입증해 주는 예이다. 1957년 장편소설 「사반의 십자가」를 발간해 이듬해 예술원상을 받고, 1961년에는 한국문인협회의 부이사장에 선임되어 활동하며 창작집 『등신불』을 펴낸다. 1968년에 그는 <워란문학>을 창간하고 1970년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1972년 서라벌예술대학 학장을 역임한다. 일흔다섯 나이에도 장편소설 「자유의 역사」와 수필집 「사랑의 심은 곳마다 솟고」를 펴내는 등, 그는 평생에 걸쳐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은 작품을 쏟아낸다. 후학을 가르치는 명장으로서 김동리의 면모를 설명해 주는 하나의 일화가 있다. 그가 가르친 6회 서라벌 예술대 졸업생 전원이 문단에 나왔다. 동리는 강의 첫날, 학생들에게 글을 쓰게 해 보고, 그 사실을 예언했다. 서울대 국문과, 고려대 국문과 강사를 거쳐 중앙대 예술대에 이르기까지 그가 강단에서 가르친 세월은 30년이었고, 김태준, 김민숙, 김원일, 김정례, 김주영, 김지연, 김형영, 노순자, 박상룡, 백시종, 송기원, 송상욱, 양문길, 오정희, 유현종, 이경자, 이근배, 이동하, 이문구, 이채영, 천승세, 한분순, 황추앙 등 빼어난 문학활동을 하는 작가들이 일백 여명에 이른다. 또한 그가 창간한 잡지만도 4종에 이르러 수많은 작품의 산실이 되고 있다. 동리가 ‘나는 단체를 싫어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자꾸 나에게 단체를 맡긴다’고 했듯이, 단체는 평생 그를 따라 다니며 무거운 짐을 안겨 주었고, 늘 선봉에서 사나운 바람을 맞게 했다. 그는 역할을 피하지 않았을 뿐, 한 번도 즐겨서 한 일은 없었다. 시대에 대한 어른으로서의 책무는 그에게 수많은 상처를 남겼으나, 그 상처는 그가 비겁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33세 때 사천청년회 회장을 시작으로 한국청년문학가 협의회장, 한국문총 사무국장, 문교부 예술위원, 서울시 예술위원, 중앙대 예술대 학장, 한국소설가협회 회장,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한일문화교류협회 회장,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등을 역임했다. 동리는 서예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대구 계성중학 2학년 때 백형이 안진경법첩을 주고 운필법을 가르쳐 주셨다. 그 뒤 다솔사에서 묵고 있을 때, 서예가 하동주 선생으로부터 본격적으로 가르침을 받았다. 동리의 서예 삼매는 58세 이후, 쭉 이어져 틈이 나는 대로 붓을 잡았다. 집안에는 항시 묵향이 감돌았다. ‘문장을 쓸 때에는 고통스러운데 글씨를 쓰는 것은 즐겁다’ 73년 회갑기념서예전 때, 오체를 두루 쓴 55점을 선보여 서예계의 주목을 받았고 검여(劍如), 동정(東庭) 일중(一中) 등과 친교를 맺는 한편, 한중일 서예문화교류협회 회장으로 추대되어 교류전을 주재해 왔다. 창작욕을 과시했던 김동리는 1990년 7월 30일 돌연 뇌졸중으로 쓰러진다. 그리고 오랜 투병 끝에 1995년(향년 82세) 숨을 거둔다. 김동리는 토속성과 외래사상과의 대립, 신비감과 허무감이 내재된 인생의 근원적 본질 추구 등을 통한 ‘인간성’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온 소설가이다. 그를 빼고는 현대한국문학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그가 한국문단에 끼친 영향은 실로 지대하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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