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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리의 대표작『등신불』과 김교각스님 (2)
정석준 동리목월문학관 상주작가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21년 11월 11일(목)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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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경북연합일보 | 동리가 머물던 다솔사(多率寺)는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의 거점이었다. 다솔사에 은거하던 만해 한용운은 1930년 최범술, 이용조, 김법린, 김상호 등과 함께, 항일 청년승려비밀결사인 ‘만당(卍黨)’을 결성하고, 당수로 추대돼 항일운동을 이끌었다. 이들은 1939년 만해의 회갑을 맞아 축하연을 연 뒤 기념으로 사찰 마당 곳곳에 편백나무 15그루를 심었는데, 그 중 7그루만 지금까지 잘 자라고 있다. 당시 최범술은 35세, 김법린은 37세, 김범부는 42세, 김동리는 26세였다. 현재의 응진전은 만해가 중수한 건물이다.
한국인으로 등신불이 된 김교각스님 한국인 중에서 등신불이 된 사람 중에는 중국에서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숭앙받는 김교각(金喬覺) 스님이 유명하다. 김교각 스님의 행적은 813년 지주시 청양현 사람인 비관경이 스님 입적 후 19년 뒤에 쓴 『구화산 화성사기』와, 이용이 편찬한 『구화산지』 등에 기록되어 있다. 비관경의 기록에 있는 출생연대 및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유추해 보면, 스님은 서기 697년 신라 33대 성덕왕의 맏아들로 태어난 김중경(金重慶)임이 확실하다. 성덕왕의 태자로 태어난 그가 왜 스님이 되었을까?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었다. 당시 신라는 삼국통일을 이루고 당나라와의 전쟁도 잠잠해진 평화의 시대였으나, 왕권을 둘러싼 권력다툼은 어느 때보다 치열했다. 효소왕을 몰아내고 성덕왕을 왕위에 올린 세력들은 주도권 싸움을 벌였고, 성덕왕 15년에 중경과 수충을 낳은 성정왕후를 외척세력의 정치적 영향력을 잠재운다는 등의 이유로 궁에서 쫓아내고, 자기의 딸을 왕후(소덕왕후)로 세웠다. 김순원의 세력이 커지면서 태자의 생명이 위태로움을 직감한 성덕왕이 중경에게 비밀호위병을 붙여 당나라로 피신시켰다. 24세의 나이에 당으로 도망간 중경은 출가하여 교각이라는 법명을 받고 이후 구화산 화성에 자리를 잡고 수행 정진하다가 99세(794년)에 열반에 들었다. 스님은 제자들을 모아놓고 고별인사를 한 뒤 입적을 하였는데, 자신의 시신을 석함에 넣고 3년 후에도 썩지 않으면 등신불로 만들라는 유언을 남겼다. 제자들이 3년 후에 석함을 열어보니 시신이 마치 잠자는 듯 그대로여서 그를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인정하고, 육신에 금을 입혀 등신불로 봉헌하였다. 중국인들은 김교각 스님을 스님이라 부르지 않고 지장보살의 화신이라 하여 ‘지장왕보살’ 또는 ‘김지장왕보살’이라고 부르며, 높이 받들고 있다. 김교각 스님의 덕분으로 구화산은 지장보살의 성지로 알려지고, 보현보살의 성지인 아미산, 문수보살의 성지인 오대산, 관세음보살의 성지인 보타산과 더불어 중국 4대 보살 성지 중 하나가 되었다. 김교각 스님의 등신불은 구화산 화성사 지장보전에 모셔져 있고, 화성사 역사박물관에는 스님의 일대기를 그린 그림이 사방으로 둘러져 있다. 스님의 생전에 누군가 “스님 고향인 서라벌에는 언제 돌아가십니까?”하고 질문을 하자 “1,300년 후에 돌아가겠다.”고 대답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화성사에서는 스님의 탄신 1,300년 주년을 맞아, 지장보살(김교각스님) 청동입상을 조성하여 경주 불국사에 기증하였고, 불국사에서는 무설전에 안치하였다. 스님이 예언한대로 1,300년 후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오신 것이다. 김교각 스님은 김동리의 소설 「등신불」의 소재가 되어 고등학교 교과서에 소개되고 있다. 그는 죽어 등신불이 되었고, 중국의 신도들이 제작한 입상으로 고향 땅 경주로 돌아와 대중을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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