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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장대와 예기소, 그리고 김동리의 무녀도
정석준 동리목월문학관 상주작가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21년 10월 28일(목)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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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경북연합일보 | 경주남산의 기린천과 경주국립박물관 앞으로 흘러내리고 있는 남천과 합류하여 서천을 이루다가 경주보문단지에서 내려오는 북천(알천)과 만나 형상강으로 흐르는 곳에 예기소(또는 예기청소)가 있고, 그 앞 작은 산봉우리에 금장대가 있다. 금장대는 뛰어난 주변 절경 때문에 신라시대 ‘3기 8괴(三奇八怪)’의 하나로 널리 알려져 있다. 3기로는 금척, 옥적, 화주 또는 성덕대왕신종을 꼽는다. 금척은 신라시조 박혁거세가 하늘의 천신에게서 받은 금으로 만들어진 자다. 금척으로 병든 사람을 재면 병이 낫고 죽은 사람을 재면 살아나는 신비한 자였다. 옥적은 신문왕이 이견대에서 해룡이 나타나 흑옥대를 바친 것이다. 이 피리를 불면 가뭄이나 홍수, 적군들이 쳐들어오거나 병도 모두 해소되었다고 전한다. 화주는 선덕여왕이 가지고 있었던 구슬인데 광선을 비추면 솜에 불이 붙었다고 전한다. 8괴는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은 남산부석, 남천의 물이 맑고 모래가 가늘어 거꾸로 흐르는 것처럼 보이는 ‘문천도사’, 움이 트면서 붉은 색을 띄는 ‘계림황엽’, 날아가는 기러기들도 반드시 쉬어 가는 ‘금장낙안’, 소나무를 베어도 순이 돋는다는 ‘백률송순’, 뿌리 없이 풀이 자란다는 ‘압지부평’, 천년이 지나도 이끼가 끼지 않고 순백의 빛깔을 간직한다는 ‘나원백탑’, 석가탑의 그림자가 비치지 않는다는 ‘불국영지’ 등이다. 금장대에는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아와 ‘금장낙안’의 풍광 속에서 신라의 흥망을 생각하며, 자연의 영원함과 인간 삶의 부질없음, 그리고 과거를 통해 오늘을 경계하며 시를 읊조리던 공간이었다.
조선시대 선비 매계 조위는 금장대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험준한 끊어진 벼랑에서 강을 굽어보나니 흥이 일어 올라가 저 먼 곳을 바라본다 고가는 연이어 이어졌고, 석수는 세워져 있는데 은은한 푸른 산에 금오가 솟구쳐 있네 폐한 동산에 연기와 꽃이 어지러이 날리니 마음은 아프고 눈 아래 빈 성에는 탑묘만이 높구나 천지는 무정하지만, 어제와 같은데 인간은 하루살이와 조금도 다름이 없구나.(매계 조위 문집)
이러한 금장대는 풍광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인류가 남긴 최초의 기록이자 예술작품인 암각화가 있다. 사람과 동물 발자국 모양, 태양을 상징하는 문양들로 청동기 시대의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곳으로 보고 있다. 금장대는 신라 제20대 자비왕 때, 을화라는 기생이 왕과 연회를 즐기다가 실수로 예기소에 빠져 죽었다는 설화가 전해 오는 곳이기도 하고, 예기소에는 천년 묵은 이무기가 살고 있는데, 해마다 한 두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곳이기도 하다. 예기소는 김동리의 ‘무녀도’의 배경이 되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서양귀신에 씌여 돌아온 아들 욱이와 모화와의 이어지는 갈등, 그리고 결국 욱이는 모화가 휘두른 칼에 숨을 거두는데, 달포 후 고운 치마 자락을 연꽃잎처럼 펼치고 예기청소로 들어가는 모화의 마지막 장면을 ‘무녀도’를 읽은 사람은 기억할 것이다. 금장대 앞 청소가 바로 그 예기소이다. 김동리의 무녀도는 전통적인 무속 신앙과 외래 종교인 기독교 사이의 충돌로 인해 모자가 맞는 비극적 파탄을 액자 구성을 통해 그리고 있다. 여기에서 무당인 모화와 기독교 신자인 그녀의 아들 욱이와의 대립은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하나의 사상적 갈등을 응축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전통적이며 전근대적인 종교인 무속 신앙과 외래적이며 근대적인 종교인 기독교와의 대립이기 때문이다. 모화에게 욱이는 자신의 세계에 침입하여 그것을 파괴하려는 적대적인 인물로 비춰지는데, 여기에서 혈연의 정은 용납되지 않으며 서로 파멸의 길을 향해 치닫는다.우리 무속에 대한 이해가 깊은 작가 김동리는 상식을 뛰어넘는 사건들(아들을 살해하는 행위, 모화의 죽음 등)을 통해 인간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초월적이고 운명적인 세계를 그리고 있다. 예기소 맞은편 강변길을 따라 시내 쪽으로 20분 정도 걷다보면 강변공원이 나오고, 그곳에 동리선생문학기념비가 있다. 이 기념비는 2019년 7월, 경주문인협회 회원 등, 뜻있는 문인들이 동리선생의 문학정신을 기리고자 경주시의 협찬을 받아 세운 것이다. 동리목월문학기념비 앞 오른쪽 도로를 따라 10여분 걸어가면 동리생가가 나온다. 동리 선생이 살던 저택의 부지는 현재 세 집으로 나누어져 있고, 현재의 집들은 모두 1960대에 지은 건물로 낡고 허물어진 채 방치되어 있어서 동리선생의 생가를 찾는 사람들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동리와 목월은 경주가 낳은 현대한국문학의 거목이다. 목월생가는 2013년 8월, 복원 하였으나 동리생가의 복원은 아직도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 경주시는 예산문제 등 어려움이 있겠지만 하루빨리 동리선생의 생가를 복원, 문학관광 명소로 육성한다면 역사문화 도시로서의 위상 제고 및 침체된 도심 경제 활성화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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