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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 조인좌(一城 趙仁佐) 선생
대한민국과 경주 위해 평생을 일관한‘애국 지식인’의 표상
독립운동·아동복지·국악계승·불교진흥 펼친 이타적 삶 살아
"내가 걸어온 처신에 대한 소리들, 고맙고 송구스러울 뿐이다"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21년 10월 11일(월) 17:52
ⓒ 경북연합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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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기획 시리즈<제75호>-경주인을 찾아서
사회편 : 첫 번째 (통합 두번째)
천년고도 경주에는 꼭 잊지 말아야 할 어른이 한 분 있다. 바로 일성(一城) 조인좌(趙仁佐, 본명 경규, 慶奎, 1902. 11. 26.~1988. 12. 26.)선생이다. 일성 선생은 경주뿐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를 아울러도 드물게 훌륭한 분이다. 그는 1970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훈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그의 투철한 애국애향정신과 더불어 파란만장했던 행적은 후세의 귀감이 되고, 삶의 이정표가 되기에 충분하다. <편집자주>

일성 선생이 남긴 공덕의 일화는 일일이 열거하기가 벅차다. 경남 함안 출신의 그는 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렀다. 그 후에도 그는 독립군 군자금 모금을 계속하다가 일제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됐다. 그는 일경을 피해 1935년 경 경주 불국사로 피신해 오면서 경주와 인연을 맺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한 독립운동뿐 아니라 경주와 지역사회를 위한 그의 헌신은 몇 차례 몇 년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타향인 경주에서 한의원을 운영하며 큰 부자가 됐으나, 자신의 재산 축적에는 일절 사용하지 않았다. 돈이 무척 귀하고 질병이 만연하던 시절, 숱한 경주시민들이 그에게 무료로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그가 3년마다 외상장부를 불태웠다는 일화는 전설처럼 전해온다. 그는 또 전쟁고아들을 거두어 보살핀 인본주의자이며, 경주에서 국악원을 지원하는 등 문화예술인을 배양하는 일에도 각별한 정성을 기울였다.
이것이 바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다. 이 정신이 잘 실천되는 사회는 선량하며 아름답다. '조인좌 선생'이 있었기에 경주는 행복했고 '조인좌 정신'을 가졌기에 경주가 더욱 경주답다.

◇도피 중에도 독립군 자금 모집
사람들은 일성 선생을 ‘애국 지식인’이라 일컫는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을 찾아 그 길을 꿋꿋하게 실천해 나갔다. 그는 세 차례의 체포와 구금을 겪었다. 모진 고문으로 육신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평생 골병을 안고 살았다. 하지만 그는 그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1926년 광복단에 입단할 때까지 우국제민과 우국충정을 가슴에 담고, 투철한 의지를 결코 꺾지 않았다.
자신이 닦은 유학적 심성은 그의 인생에 큰 자양분이 됐다. 유년시절 어머니를 따라 배우고 느꼈던 불교는 1920년 중반 이후 인생 노정뿐 아니라 독립운동자금 모집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일제강점 하에 독립운동자금 모집은 공식 자료로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삶과 생활이 자금모집과 다르지 않았다. 그는 모금에 있어서 평화적인 방법을 견지했고, 그 방법이 여의치 않자 자신 스스로 마련한 소득을 자금으로 오래토록 제공했다.

◇대자원, 교육진흥에 혼신 다해
일성 선생은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인 1953년에 불교계 첫 고아원인 일성복지재단 대자원(大慈園)을 설립해 수많은 전쟁고아의 대부 역할을 했다. 당시 경주역 앞에는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숱한 아이들이 구걸을 하고 있었다. 그곳을 지나던 그는 눈물이 앞을 가려 발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그는 이 아이들을 건강하게 키워 내 대한민국의 동량으로 세워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는 그 결심을 미루지 않고 실천에 옮겨 대자원을 설립했다. 선생은 대자원 외에도 교육사업에도 뜻을 둬 시립국악원, 경주서도학원, 경주기술고등학교를 설립하는 등 지역의 교육진흥을 위해서도 혼신을 다했다.
현재 대자원은 선생의 뜻을 이어 손자인 조영제 대자원장이 맡고 있다. 일성조인좌현창사업회는 김윤근, 조철제 전현직 경주문화원장이 차례로 회장을 맡아 선생의 뜻을 잇고 있다.

◇국악 계승발전에 각별한 애정
일성 선생은 한의의 달인으로서 '부용당 할배'로 알려져 있다. 그는 수익을 모아 전통문화예술을 계승발전시킬 의향으로 동도국악원을 개설했다. 시조의 보급을 위해 경주시우회(동도시우회)를 조직했고, 직접 영제시조창을 했다. 1966년 3월 시립국악원을 개설해 국악중학교 과정을 넣어 후진양성에 힘썼다. 경주시립국악원은 국립국악원의 최초 분원이 됐다. 그곳에서 양성된 인재들이 경주를 대표하는 무형문화재가 됐다. 그는 사재를 털어 민간인의 신분으로서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교육에 투자했다.
일성 선생이 타계한 지 33년, 경주는 얼마나 발전했으며, 우리는 행복해졌는가를 되묻게 된다. 경주시의 무관심 속에 경주시립국악원이 폐원된 것도 모자라 최근에는 동국대 경주캠퍼스가 국악과 신입생 모집을 중단했다니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쉼 없이 이타심 실천한 불제자
일성 선생의 삶은 위로는 불제자가 되고자 끊임없이 증진하고, 아래로는 가없는 중생을 구하러 온 몸을 던진 거룩한 삶이 아니었을까?
그는 독실한 불교신자로서 근면하고 정직하며 봉사하는 삶을 실천했다. 불교를 생활덕목이며 생의 지표로 설정하고, 인류의 진정한 평화는 자신을 낮추고 버리는 부처의 진리 속에 있음을 확신했다.
그는 민족정기함양과 불교진흥을 위해 이차돈·원효양성사봉찬회를 창립했다. 이는 불교진흥만이 아니라 민족 정신의 계승의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일성 선생은 "내가 걸어온 처신에 대해 비난의 소리가 있건, 칭찬의 소리가 있건 그것은 어느 쪽이든 지금의 나에게 모두가 고맙고 송구스러울 뿐이다"라는 어록을 남겼다.
이는 자신이 세운 수많은 업적을 드러내지 않고 그 모든 것에 대해 오히려 고맙고 송구스럽다는 표현으로서 일성 선생이 '보살의 경지', '성자의 반열'에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음을 의미한다. 강병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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