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경북연합일보 | “바람이 분다고 하되 / 임 앞에 불지 말고 / 물결이 친다고 하되 / 임 앞 치지 말고 / 빨리 빨리 돌아오라 / 다시 만나 안고 보고 / 아흐! 임이여 잡은 손을 / 차마 물리라뇨.”(정연찬 현대역) 신라왕들의 이목을 사로잡은 절세미인이자 불세출의 여장부, 미실(美室)이 지은 풍랑가(風浪歌)는 신라 여인의 전쟁과 사랑을 역동적으로 표현했다. 미실은 풍랑가를 통해 뻗어나가는 신라 화랑의 드높은 기상과 더불어 신라 여인의 섬세함을 오롯이 담아냈다. 풍랑가는 향가 중 유일하게 삼국유사가 아닌 ‘화랑세기 필사본’을 통해 전해졌다. 진흥왕 때 지어진 최고(最古)의 신라향가다. ‘송사다함가(送斯多含歌)’, ‘송출정가(送出征歌)’로도 일컫는다. 그러나 다수의 역사학계에서는 신라 화랑들의 계보를 엮은 ‘화랑세기 박창화 필사본’을 위작으로 본다. 또 일부 한문학자들도 풍랑가가 이두(吏讀) 위주로 쓰인 점을 들어 매우 정교하게 짜인 위작으로 본다. 이에 반해 일부 역사학계와 문학계에서는 진본 가능성을 높게 본다. 풍랑가가 매우 교묘히 위작됐다 해도 여러 사람이 공감하고 검증하는 가운데 그 ‘문학성’마저 위조하기는 쉽지 않다는 게 문학자들의 견해다. 박창화 필사본은 위작 여부에 대한 논란과 더불어 문학적 성과에 있어서 차별 논란도 불러온다. 위작 주장에서는 화랑세기 필사본의 위작 시기를 1930~1941년 말 사이라고 한다. 박창화가 그 시기에 위작을 위해 향가 풍랑가를 직접 지었다는 논리다. 왜냐하면 1929년 일인 학자 오쿠라 신페이가 삼국유사에 나오는 신라향가를 최초로 해독했고, 양주동은 1941년 한국인 최초로 신라향가를 해독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박창화가 양주동보다 앞선 한국인 최초의 향가 해독자겸 ‘현대 향가’를 창작한 최초의 작가가 되는 셈이다. 그러나 위작론자들은 박창화의 위작에 대해서 비판만을 말할 뿐, 그 결과 저절로 인정되는 문학적 의의를 일절 말하지 않는다. 이는 자기의 모순이며, 차별행위로서 결국 판단의 오류로 귀결될 위험성이 매우 크다. 풍랑가는 전장으로 출정하는 풍월주(風月主)를 사모하고 찬양하는 신라향가의 진수를 보여준다. 소재와 구성이 매우 역동적이다. 공감각적 표현에서 분출하는 회화적 이미지는 대하드라마의 명장면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종장의 감탄구와 반어법적 종결도 돋보인다. 음악적으로는 신라 고취대가 연주했던 ‘행진곡’과 일맥상통할 수 있다. 미실은 출중한 미모와 학식을 소유했고, 몸에 아름다움의 정기를 모은 진골 여인이다. 신라에는 왕실 여인을 배출하는 혈통이 있었으며, 미실은 대원신통 혈통의 계승자였다. 미실은 전통에 따라 가무와 왕가 여인의 비법을 온몸에 익혔다. 미실의 외할머니는 1대 풍월주 위화랑(魏花郞)의 장녀 옥진궁주(玉珍宮主)다. 그녀는 법흥왕의 사랑을 받았으며 영실과의 사이에서 미실의 어머니 묘도(妙道)를 낳았다. 묘도는 2대 풍월주 미진부(未珍夫)와의 사이에서 미실을 낳았다. 미실은 일찍이 진흥왕의 이복동생 세종에게 간택됐다가 진흥왕의 모후인 지소태후(只召太后)로부터 궁에서 쫓겨난 후 사다함을 만나 정분이 일었다. 사다함이 출정하게 되자 미실은 풍랑가를 지어 사다함을 전쟁터로 보내는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그 소식을 들은 세종은 미실을 그리워하며 괴로워했다. 결국 지소태후는 미실의 재입궁을 허락했는데 그때 세종에게는 정비 융명이 있었다. 그런데 미실은 세종의 궁에 들어와서 색공(色供)에 응하지 않았다. 마음이 달아오른 세종은 미실을 정비로 삼게 해달라고 모후에게 간청해 결국 미실은 정비가 됐다. 사다함은 가야 잔당을 굴복시키고 돌아와 이 같은 사실을 알고서 한시 청조가(靑鳥歌)를 지어 애달파했다.
"파랑새야 파랑새야 저 구름 위의 파랑새야, 어찌하여 나의 콩밭에 머무는가, 파랑새야 파랑새야 나의 콩밭의 파랑새야, 어찌하여 다시 날아들어 구름위로 가는가, 이미 왔으면 가지 말지 또 갈 것을 어찌하여 왔는가(1연) 부질없이 눈물짓게 하며 마음 아프고 여위어 죽게 하는가, 나는 죽어 무슨 귀신 될까. 나는 죽어 신병 되리, (전주)에게 날아들어 보호하여 호신(護神) 되어, 매일 아침 매일 저녁 전군부처 보호하여, 만년 천년 오래 죽지 않게 하리(2연)" 사다함은 결국 미실에 대한 실연의 아픔을 이기지 못하고 약관의 나이에 죽었다. 이후 미실은 진흥왕의 후궁이 돼 권력을 장악, 왕실과 화랑도의 원화들을 두루 휘하에 두고 군림했다. 그녀는 진흥왕이 죽고 진지왕이 즉위하자 폐위시켰고, 진평왕이 즉위하자 그와 관계를 맺어 조정의 업무를 또다시 장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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