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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신앙대상은 무엇인가?(2)
정석준 수필가, 법사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21년 08월 19일(목)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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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경북연합일보 | 부처님의 가르침은 세월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 따라 다른 것도 아닌 누구에게나 공통되는 행복의 길, 참된 삶의 길이다. 부처님께서 처음으로 이 길을 발견하신 것이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인간은 신의 창조로 이루어졌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신이 인간과 만물을 만들었다고 한다면 인간이란 결국 신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공장에서 물건을 만드는 것은 인간의 필요 즉, 쓰임새에 따라 만들어지고 있듯이 인간이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면 인간의 의지보다는 오직 신의 섭리, 신의 눈치만 보고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기의 노력과 그 대가로 행복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조물주인 신의 뜻에 의해서만 행복과 불행이 결정된다면, 인간의 의지나 노력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이 얼마나 모순이며 불합리한 일인가? 부처님은 최초로 인간을 신의 종속에서 해방시킨 분이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얻으신 후 우리 중생들을 구제하시고자 80 평생을 하루도 쉬지 않고 법을 펼치셨는데, 부처님의 가르침을 집대성한 것을 경전, 또는 불경·일체경·대장경·팔만대장경 등으로 부르고 있다. 법[경전]은 인간이 괴로움(苦)에서 벗어나 열반을 증득할 수 있는 가르침이기 때문에 법보(法寶)라 하여,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세 번째, 승(乘)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승을 범어로는 상가(Samgha)라고 하는데, 이를 음역하여 승가라고도 하며, 간략하게 승이라고도 하고, 화할 화(和) 무리 중(衆)자를 써서 화합중(和合衆) 또는 화합승려라고 하기도 하고, 여러 불자들이 화합하는 것이 마치 여러 강물이 모여서 바다를 이루지만 바닷물의 맛은 한가지인 것에 비유해서 바다 해(海), 무리 중(衆)자를 써서 해중(海衆)이라고도 한다. 다시 말하면 승이란 화기애애하게 모여 사는 부처님의 제자를 말한다. 그러니까 부처님의 제자란 단순히 스님들만이 아니고 사부대중(四部大衆)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부대중이란 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를 가리키는데, 이중 비구·비구니는 출가한 남·여 스님이며, 우바새·우바이는 재가 남·여 신도이다. 이처럼 승가는 출가 승려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리 출가 2중과 재가 2중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승가 즉 스님들과 신도들을 승보(僧寶)라고 하는데, 왜 승(僧)을 보배라고 하는가하면, 승가가 있음으로써, 부처님의 가르침을 홍포하고 후세에까지 불법을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승가가 없다면 우리는 지금 어떻게 부처님을 알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제자들을 승보라 하여 부처님과 똑같이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재가 신도라도 부처님의 정법을 바르게 깨닫고 이를 널리 전하는데 노력하는 사람은 삼보의 하나인 승보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자들은 스님들을 존경해야 함은 물론이지만, 신도님들 가운데서도 남의 모범이 되는 불자는 다 같이 존경하고 받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불·법·승, 이 세 가지 보배는 어느 하나를 따로 떼어 생각할 것이 아니라, 부처님(佛)과 부처님의 가르침(法)과 부처님의 제자(僧)를 한 덩어리로 똑같이 공경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더불어 이 세 가지 보물을 밖으로만 찾을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 가운데서 찾아내야 한다. 우리의 청정한 근본자성이 바로 불보이다. 왜냐하면 이 불성은 부처와 중생이 본래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6조 혜능대사는 “깨달으면 부처요 미(迷)하면 중생이다”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자성 가운데의 불보를 공경하는 마음을 갖고, 이 소중한 보배를 찾도록 노력해야 한다. 또 우리의 성품이 보배이다. 왜냐하면 이 성품이 온갖 생각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역시 6조 혜능스님은 “선지식아 일체 수다라와 모든 문자로 된 12부 경전이 모두 사람으로 말미암아 있는 것이며, 지혜의 성품으로 세워진 것이니, 만일 세상에 사람이 없다면 일체만법이 본래 제 스스로 있을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우리의 4대 육신 가운데서 승보를 찾아야 한다. 우리는 간혹 육신을 천대하지만, 이 육신을 떠나서는 부처도, 법도 간직할 곳이 없다. 부처님의 법을 전하기 위해서도 이 육신이 있어야 하므로 승보요, 갖가지 인연이 모여서 마음의 명령에 따라서 잘 움직이는 이 육신이야 말로 참으로 화합이 잘 이루어진 승보인 것이다. 삼보에 대한 귀의를 삼귀의(三歸依)라고 하는데『율장대품』에 의하면 그 형식은 다음과 같다.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가르침에 따르는 승가에 귀의합니다. 거듭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거듭 가르침에 따르는 승가에 귀의합니다. 다시 한 번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다시 한 번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다시 한 번 가르침을 따르는 승가에 귀의합니다.” 왜 세 번을 반복하여 귀의토록 하였겠는가? 그것은 삼보에의 귀의야말로 불교 신앙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삼귀의를 귀명(歸命) 삼보라고도 하는데, 이 말은 목숨을 바쳐 삼보에 귀의한다는 뜻으로서, 삼보에 자기의 전 인생과 심지어 하나밖에 없는 생명까지도 바치겠다는 마음가짐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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