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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가순례8 - 서라벌 밝은 달밤의 정사‘처용가’
강병찬 본지 취재국장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21년 07월 25일(일)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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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경북연합일보 | “서라벌 밝은 달에 / 밤들도록 노니다가 / 들어와 자리 보니 / 가로리(다리가) 넷이구나 / 둘은 내애엇고(내 아내의 다리이고) / 둘은 뉘해엇고(누구의 다리인가)? / 본디 나의 것이지마는 / 빼앗겼으니 어찌하릿고.”(이임수 현대역) 처용랑(處容郞)이 지은 처용가(處容歌)는 신라시대의 적나라한 성 문화를 엿볼 수 있다. 신라시대에는 남녀교제가 자유로웠고 성적으로 분방한 시대였다. 일시적인 사랑뿐만 아니라 일생을 함께 할 배필을 구하는데도 본인들의 독립적인 의사가 결정적인 요소가 됐다.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문명황후 문희의 혼전 연애와 임신에서 알 수 있다. 자유분방한 연애관이었던 만큼 외도와 그에 따른 가정의 파탄도 비일비재했다. 서라벌의 달 밝은 밤에 늦게 집으로 돌아온 처용랑도 그의 아내가 다른 사람과 동침하고 있는 현장을 목격했다. 그 장면을 보고 그는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그냥 물러 나왔다. 처용랑의 아내와 동침한 사람이 처용랑의 행동을 보고 자기의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니, 그가 바로 역신(疫神, 천연두)이었다. 역신은 처용랑이 그런 사태를 당하고도 노여워하지 않은 것에 감동했다. 그는 처용랑의 형상을 그린 그림만 보여도 그 집 문안으로 다시는 들어가지 않겠다는 맹세를 했다. 이 부분에서 역병(疫病, 천연두)을 물리치는 ‘처용무(處容舞)’가 탄생했다. 내용이 참 괴이하다. 고대국가에서 간통한 처는 대개 처벌의 대상이다. 그런데도 처용랑은 아무런 조처를 내리지 못했다. 처용랑은 역신의 아내 유린에도 불구, 그저 사과만 듣고 말았다. 이어서 그는 역병 퇴치라는 역할만을 수행했다. 예로부터 역신이나 도깨비는 권력가, 부자, 침략자를 의미한다. 폭군의 백성에 대한 인권유린의 대표적 사건이 유부녀의 겁탈이다. 또 망국의 대표적 징조가 사회 전반적인 도덕의 문란과 그에 따른 가정의 파탄이다. 실체가 모호한 처용랑은 실존 인물로 보며, 이름 뒤에 붙은 ‘낭(郞)’은 화랑을 의미한다. 처용랑은 아랍계 이주자, 동해안지역 토호의 아들 등으로 추정되며, 기인(其人, 인질)으로 잡힌 듯하다. 하지만 그는 고관이 됐고, 미녀를 하사받았다. 처용가는 신라 상류층의 정략결혼, 처용랑의 방탕한 삶, 화랑 가계의 도덕적 문란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처용가가 지어진 당시는 통일신라 후기 헌강왕 때다. 신라는 사회적 안정과 풍요로움을 누렸으나, 왕과 중앙귀족들은 함께 향락을 즐기는 데 몰두했다. 삼국유사에는 헌강왕의 춤판이 세 부분에 걸쳐 나온다. 헌강왕이 포석정(鮑石亭)에 행차했을 때 남산의 신이 나타나 춤을 추자 왕도 이를 따라서 춤을 추었는데, 이 춤이 어무상심(御舞祥審) 혹은 어무산신(御舞山神)이다. 헌강왕이 금강령(金剛嶺)에 갔을 때는 북악(北岳)의 신이 나타나 춤을 추었는데, 이가 옥도령(玉刀鈐)이다. 헌강왕이 동례전(同禮殿)에서 연회를 열었을 때는 지신(地神)이 나와서 춤을 추었는데, 이가 지백급간(地伯級干)이다. 같은 때에 신라 지배층 성의 문란이 막장에 이르렀고, 그것을 경계하면서 나온 춤판이 처용무가 아닌가 한다. 일연 스님은 삼국유사를 통해 산신과 지신이 장차 나라가 망할 것을 알고 춤을 추어 이를 경계하도록 했으나, 나라 사람들이 이를 깨닫지 못하고 더욱 향락에 빠져 마침내 나라가 망하고 말았다는 의미로 통일신라 하대의 망국적 향락·귀족문화를 질타했던 것이다. 처용가는 화랑도의 기강이 무너져 내리면서 국가도 패망의 과정에 들어섰다는 뼈아픈 교훈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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