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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가순례7 - 잣나무처럼 푸른 신의, 원가
강병찬 본지 취재국장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21년 07월 21일(수)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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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경북연합일보 | “물 좋은 잣나무가 / 가을에도 안 시들어짐에 / 너 어찌 잊으랴 하시던 / 우러러보던 낯빛이 고치실 줄이야 / 달그림자 고인 못에 / 출렁이는 물결에 모래 이듯이 / 모습이야 바라보나 / 세상도 갓 숨은 것이야.”(이임수 현대역) 신충(信忠)이 지은 원가(怨歌)는 믿음을 저버린 군왕에 대해 원망을 섞어 시를 짓고, 곡조를 붙였다. 원가에서 발현된 정신세계는 믿음, 의리, 흠모, 충성의 개념이 아름다운 자연현상과 결부돼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신하의 군왕에 대한 원망이라는 것은 군왕을 부모와 동일시 한 가운데 우러럼과 애정을 담은 역설적 표현이다. 신충은 왕의 신의를 촉구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자신의 충성심을 강조했다. 우리민족의 핵심 캐릭터인 ‘은근과 끈기’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원가는 신라 귀족의 개인적 기원을 담은 향가다. 서정성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바탕에는 화랑도의 ‘사군이충(事君以忠)’이 녹아있다. ‘백수가(栢樹歌)’, ‘잣나무가’라고도 불린다. 삼국유사 피은(避隱)편에 ‘신충괘관’(信忠掛冠, 신충이 벼슬을 그만두다)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신라 34대 효성왕(孝成王, 재위 737~742년)이 왕자 시절에 신충과 잣나무 아래에서 바둑을 두다가 “저 푸른 잣나무처럼 내 항상 그대를 잊지 않겠다”라고 말했다. 신충이 일어나 절을 했다. 그런데 몇 달 후에 왕자가 왕으로 등극해 공신들을 포상하면서 신충은 잊고 상을 주지 않았다. 그러자 신충이 왕의 약속을 생각하며 원망스러운 마음에 향가를 지었다. 신충은 효성왕의 즉위와 함께 등용되지 못했고, 2년이 지나서야 중시(中侍)로 등용됐다. 이러한 사정은 효성왕이 어린 나이로 태자가 돼 세력 기반이 약했을 때, 그의 옹립을 위해 신충이 적극적으로 협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일파의 견제로 왕이 맹세를 지키지 못했다고 추정된다. 이후 등용된 신충은 효성왕과 그의 동생인 경덕왕까지 2대에 걸쳐 오랫동안 총애를 받아 높은 벼슬을 했다. 원가는 “색깔 좋은 잣나무는 가을이 되어도 변치 않는데, 잣나무를 두고 언약한 왕의 얼굴빛이 고치실 줄이야”라는 대목으로 전개된다. 이는 고려시대에 지어진 정과정곡의 정서와 유사해 상관관계가 주목된다. 정과정곡은 ‘고려사 악지(高麗史 樂志)’에 이제현(李齊賢)의 해시(解詩)가 제작 동기와 함께 수록돼 있다. 정과정곡은 우리말로 전하는 고려가요 가운데 작가가 확실한 유일한 노래다. 우리말 노래는 ‘악학궤범(樂學軌範)’에 전한다. ‘대악후보(大樂後譜)’에는 노래와 함께 곡조도 아울러 표시돼 있다. 원가와 정과정곡과의 상관성이 중요한 것은 그 속에 신라향가의 정체성과 음악적 요소를 추론해 볼 수 있는 단서가 있기 때문이다. 향가의 음악성 탐구에 있어서, 중세의 악보들이 고대의 음악을 전승해 담아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향가 형식이 ‘삼구육명(三句六名)’이라 할 때 제3구는 세 단락을 말하는데 원가에서는 마지막 단락인 2행이 없어졌다. 2행의 상실은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에 신라향가를 기록할 때 자신의 의견이나 추측으로 각색하지 않고, 자료에 근거해 남아있는 그대로를 기록했음을 보여준다. 배경설화는 신충이 말년인 경덕왕 22년에 남악으로 들어가 단속사를 짓고 승려가 돼 왕의 복을 빌었다고 전한다. 신충은 원가를 지어 왕을 원망했던 만큼 퇴임 후 은거를 하면서도 끝까지 의리를 지키고 충성을 바쳤다는 화랑도의 투철한 국가관을 후세에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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