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진평왕릉-포근하고 따스한 정감을 주고 있는 능 (1)
정석준 수필가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21년 07월 07일(수) 19:07
|
|
 |  | | | ⓒ 경북연합일보 | 경주시내에서 보문관광단지 방향으로 가다보면 보문마을이란 푯말이 보이고 들판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조금만 가면 보문마을이 나온다. 마을 앞으로 왕버들·포구나무·소나무들이 일렬로 늘어선 채 숲을 이루고 있고, 그 끝자락에 진평왕릉이 자리하고 있다. 진평왕릉은 벌판에 있는 능이다. 신라왕릉 가운데 평지에 있는 능은 여럿 있으나 벌판에 자리하고 있는 능은 진평왕릉 뿐이다. 왕릉의 지름은 38m이고, 높이는 7.6m로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분이며, 아무런 장식이 없다. 다만 흙으로 덮은 무덤 밑 둘레에는 자연석을 사용하여 보호 석렬(石列)을 갖춘 것으로 여겨지나 겉으로 드러난 것은 몇 개뿐이다. 정양모 선생(전 경주국립박물관장)은 “신라문화의 품격을 알려주는 것은 장항사 절터, 에밀레종소리, 진평왕릉, 이 세 가지다”라고 말씀하셨다는데, 막상 이곳에 와보니, 조금은 이해가 될 것 같다. 진평왕릉은 천마총이나 황남대총처럼 봉분이 우람하지도, 김유신 장군묘나 괘릉처럼 12 지상이나 무인상도 없다. 그런데도 왕릉으로의 위용을 잃지 않으면서 마치 어머니 품속같이 포근하고 따스한 정감을 주고 있는 능이다. 진평왕은 24대 진흥왕의 손자이다. 진흥왕에게는 동륜(銅輪)과 금륜(金輪, 또는 舍輪)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동륜태자가 일찍 죽는 바람에 그 아우인 금륜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이분이 25대 진지왕(眞智王)이다. 그러나 진지왕은 즉위 4년 만에 “정치가 어지럽고 황음(荒淫)하다”는 이유로 폐위되고, 동륜태자의 아들 백정(白淨)이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바로 26대 진평왕(眞平王, 579~632)이다. 진평왕은 12세에 즉위하여 65세에 사망하였으므로 시조왕 다음으로 54년이란 오랜 기간 왕위에 있으면서 여러 차례에 걸친 고구려와 백제의 침공을 막아냈으며, 남산성을 쌓고, 명활산성을 개축하는 등 왕경 방어에도 힘을 기울였으며, 중국의 수나라·당나라와의 외교에 힘써 후일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진평왕은 신체가 무척 장대하였는데『삼국유사』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진평왕은 키가 11척의 장신이었다. 제석궁에 거동했을 때 돌계단을 밟았는데, 돌 2개가 한꺼번에 부러졌다. 그러자 진평왕은 옮기지 말고 그대로 두었다가 후세 사람들에게 보여주라고 하였다. 이것이 왕경 안에 있는 다섯 개의 움직이지 못하는 돌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왕이 즉위한 원년에 천사(天使)가 대궐 뜰에 내려와 왕에게 옥대(玉帶)를 전하였고, 왕은 종묘의 큰 제사를 지낼 때는 항상 이 옥대를 사용하였다. 진평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분이 선덕여왕이다. 2009년 5월부터 12월까지 드라마 선덕여왕이 방영되어 시청률이 30%를 웃돌 정도로 인기를 모았고 그로 인하여 경주를 찾는 관광객이 부쩍 늘어나 경주는 관광특수를 누리기도 하였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드라마는 우선 재미가 있어야 한다지만-역사를 왜곡한 점이 너무 많았다. 예컨대 덕만과 천명공주는 쌍둥이로 태어났는데, 시조왕(박혁거세) 때부터 왕이 쌍둥이를 낳으면 성골(聖骨) 남자의 씨가 마른다(御出雙生 聖骨男盡)는 예언 때문에 부득이 쌍둥이 딸 중 하나인 덕만을 몰래 궁 밖으로 내보냈다든가, 덕만이 왕위에 오른 것은 그의 탁월한 능력 때문이라고 한 것은 순전히 작가가 꾸며낸 상상력에 다름 아니다. 『삼국사기』나『삼국유사』에 “성골의 남자가 없어졌으므로 여왕이 즉위한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덕만이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그가 성골이었기 때문으로 봐야 할 것이다. (계속)
|
|
|
경북연합일보 기자 - Copyrights ⓒ경북연합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
|
|
|
|
|
|
|
|
실시간 많이본 뉴스
|
|
|
|
|
최신뉴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