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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호국보훈의 달 떠오르는 단상들
김진규 본지 취재본부장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21년 06월 08일(화)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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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경북연합일보 | “자네는 언제까지 이 호 속에 있을 것인가?” “예 각하, 저는 군인입니다. 저의 직속상관으로부터 철수하라는 명령이 있을 때까지 있을 것입니다.” “명령이 없을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옛! 죽는 순간까지 여기를 지킬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맨주먹으로 싸우고 있습니다. 놈들의 전차와 대포를 까부술 수 있도록 무기와 탄약을 주십시오.” 이 대화는 6·25 전쟁 발발 나흘 후 한강 남변 교두부에서 있었던 맥아더 장군과 한국군 병사와의 유명한 대화의 한 토막이다. 이때 맥아더 장군은 그 병사의 손을 꼭 쥐고서 한국군 통역 장교에게 말했다. “대령! 이 씩씩하고 훌륭한 병사에게 전해주시오, 내가 일본 도쿄에 돌아가면 즉시 미군 지원군을 보낼 것이라고 그리고 그때까지 용기를 잃지 말고 훌륭히 싸우라고.” 그러나 그토록 굳은 결의를 가지고 전선을 지키던 한국군 병사의 노력도 헛되이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경부선 도로와 철길을 따라 남진했다. 수원, 조치원, 대전… 추풍령을 넘어 대구 북쪽 왜관까지, 호남 방면은 거의 무저항으로 공주, 전주, 목포, 하동, 진주를 거쳐 마산 서쪽 가야까지, 그리고 동해안 영일만까지 진출하게 된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40일, 하지만 더이상 진격은 일단 돈좌된다. 낙동강방어선을 최후저지선으로 국군과 유엔군의 대반격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6·25 전쟁은 우리 민족사뿐 아니라 세계사를 뒤흔든 국제적 이념전쟁으로 규정되어 있다.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개전 사흘 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되고 그 후 3년여에 걸친 골육상쟁은 강산을 피로 물들었다. 아직까지 6·25 전쟁의 공포는 뇌리 속에 선명히 남아 있다는 어느 80대 노인은 피신해 있던 동굴에서 가끔 나와보면 소위 쌕쌕이란 전투기가 요란한 굉음을 내며 하늘을 치솟는 광경이 목격되었는데 그 순간 공포와 전율이 몸을 덮었다고 했다. 당시의 위정자들, 군사 지도자들은 북한의 남침과 적화통일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남한은 주한미군이 이미 철수되고 미국 국무부 애치슨의 AJO라인까지 선포된 상황이었다. 사태가 이럴진대 당시 신성모 국방 장관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 국군은 점심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북한군의 막강한 전투력을 과소평가했고 그들의 기만적인 평화공세전술에도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시대를 막론하고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훌륭한 지도자와 지도층의 존재 여부는 국운을 좌우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의 한국전쟁 기념공원에는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Freedom is free)’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유엔군의 참전 이유는 자유수호였던 점에 비추어 봐도 자유는 당시를 지배했단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시대가치였다. 이 땅에 평화와 번영 대신, 전쟁과 폐허가 조국산하를 삼켜버릴 제2의 6·25 비극은 더는 없어야 한다. 이웃 나라 월남의 경우 망국의 아픔이 동병상련처럼 다가왔다.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이하여 평화의 소중함과 함께 그 평화를 지키기 위한 안보의 중요성을 가슴에 새긴다. 그리고 평화적 통일을 이루는 그날이 하루속히 오기를 진심으로 염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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