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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가순례3 - 국민의 태평을 염원한 충언‘안민가’
강병찬 국장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21년 05월 23일(일)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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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경북연합일보 | “임금은 아비요 / 신하는 사랑하는 어머니 / 백성은 어리석은 아이라 할 때 / 백성이 사랑하심을 알 것입니다. / 꾸물거리며 살아가는 (배가 큰) 중생 / 이들을 먹여 다스려라 /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갈까’ 할 때 / 나라를 (어떻게) 지킬 것을 알 것입니다 /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한다면 / 나라가 태평할 것입니다.(이임수 현대역)” 낭승(郞僧) 충담사(忠談師)는 일찍이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를 지어 널리 이름이 알려졌다. 경덕왕이 충담사에게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을 묻자 안민가(安民歌)를 지어 바쳤다. 안민가는 왕은 아버지처럼 원칙과 위엄을 갖추고, 신하는 어머니처럼 인자하게 백성을 살피고, 백성은 아이처럼 각자 맡은 바를 다한다면 나라가 태평하리라는 국가경영의 방법을 말했다. 충담사는 이름 그대로 충성스러운 말로 백성을 교화하는 스승이라는 뜻이다. 왕족과 귀족계급은 어느 때나 부요한 생활을 누렸다. 그에 비해 백성들의 삶은 언제나 생계에 쪼들려 힘들었다. 더욱이 지배계급이 권력을 휘둘러 백성들을 수탈하거나 억압하는 현상은 당시에도 두드러졌다. 그래서 충담사는 유교적 사상의 ‘군주론’에 바탕을 두고서 불교의 정법사상을 결부해 군왕과 신하들이 감당해야 할 책무들을 안민가로 준엄하게 선언했다. 통일신라기에 신라는 중앙집권을 강력하게 추구했고, 조정과 국가기관들은 급격히 관료화돼 갔다. 이에 충담사는 그들의 책무를 신랄하게 주문하고 있다. 안민가의 제작 배경은 신라 경덕왕 때의 정치적 상황과 깊은 관계가 있다. 8세기 중엽 신라 경덕왕 때 하늘에 해가 둘이 나타나는 변괴가 생겼다고 기록된 것은 왕권다툼으로 정치가 어지러운 상황이었음을 암시한다. 그러자 경덕왕은 귀정문 누상에 단을 만들고, 대덕(大德)을 불러 그에게 국가를 다스리는 방법을 묻고, 국가의 태평을 비는 의식을 올렸다. 충담사는 ‘백성이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갈까’라고 써서 국왕과 귀족계급을 안심시키는 듯하다. 그러나 실상 이것은 당시 민중들의 힘겨운 사회상을 내포한 역설적 표현이다. 백성이 유민이 돼 고향과 나라를 등지는 현상은 비일비재 했을 것이다. 충담사는 또 백성의 입에서 “이 나라를 떠나는 일이 없겠다”는 확신의 말이 나와야 하지 않겠느냐면서 국왕과 신하들을 다그치고 있다. 충담사는 9, 10행에서 앞선 행들의 내용을 요약해 기술함으로써 고전적 강조기법을 사용해 안민을 위한 각자의 역할을 거듭 강조했다. 귀정문(歸正門)이란 이름은 불교에서 서방정토로 돌아가는 문으로 아미타 사상이 깃든 이름이다. 귀정문은 경주 월성(반월성) 궁궐 서쪽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임수는 현재 경주 월성으로 서북쪽에서 들어가서 우측으로 성 위를 따라 걸어가면 서편에 경주향교가 보이는 낮은 성곽이 있는 곳을 귀정문으로 추정했다. 안민가를 지은 음력 3월 3일 삼짓날 신라를 비롯한 삼국에서는 재액을 털어 버리는 의식을 치렀다. 그 의식에 충담사는 국민적 스승으로 초대돼 직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안민가에 왕권 안정은 아랑곳없이 평안을 갈구하는 민중의 염원만을 가감 없이 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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