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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가순례2 - 잣나무 가지처럼 높은 기상, 찬기파랑가
강병찬 본지 취재국장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21년 05월 16일(일)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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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경북연합일보 | “울어 지침에 / 나타난 달이 / 흰 구름 좇아 떠가는 어디쯤 / 모래 가른 나루터에 / 기파랑의 모습 같은 숲이여 / 수모내 조약돌에 / 낭이 지니고 계시던 / 마음의 끝이라도 좇고 싶습니다. / 아으! 잣나무 가지처럼 높아 / 서리 모르실 화랑이시여. (이임수 현대역)”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를 지은 충담사(忠談師)는 낭승(郎僧)이다. 경덕왕은 충담사를 왕사(王師)로 봉했으나 충담사는 삼가 절을 하며 간곡히 사양했다. 고위 작위에 굳이 얽매이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신비함을 유지하고 있다. 찬기파랑가는 신라 제35대 경덕왕(景德王, 재위 742~765) 때 지어진 향가다. 경덕왕은 충담사의 찬기파랑가를 잘 알고 있었다. 찬기파랑가는 배경설화가 없는 단독 향가인데, 충담사가 지은 또 하나의 향가인 ‘안민가(安民歌)’의 배경설화에서 경덕왕은 ‘찬기파랑가의 뜻이 매우 고상하다(其意甚高, 기의심고)’고 평가를 했다. 신라가 문화공동체였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찬기파랑가는 화랑의 우두머리인 기파랑을 찬미했다. 기파랑의 인격을 잣나무의 높은 기상에 비유했다. 그의 죽음을 애도한 만가다. 찬기파랑가의 두드러진 비유적 표현은 탁월한 문학성을 내뿜는다. 또한 애상적인 면이 없고, 진취적인 기상이 투철하다. 찬기파랑가는 10구체 향가가 약간 변형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데, 앞의 5구와 뒤의 3구에서 각기 현실과 이상을 대비시켰다. 짙은 비애가 깔린 찬기파랑가는 독자의 심금을 울린다. 작가가 뼈저리게 느끼는 비애는 달을 불러왔다. 달이 흰 구름을 좇아간다는 표현은 인생의 유한함과 대자연의 위대함을 대조시켰다. 그리하여 지극한 여망이 자연계의 질서를 움직일 수 있다는 간절함이 배여 있다. ‘모래 가른 나루터’, ‘기파랑의 모습 같은 숲’, ‘냇가의 조약돌’ 같은 표현들은 생전에 느꼈던 지상의 자연물들을 활용해 기파랑에 대한 그리움을 공감각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높은 곳의 잣나무 가지’는 기파랑의 높은 기상과 인격을 찬양한다. 작품의 배경은 경주시 문무대왕면(양북면) 입천리로 추정된다. 향찰 원문 중 논란이 많은 ‘일오천리(逸烏川理)’에 대해 이임수는 ‘수모내(네), 시무내, 수무내, 시문네’ 등으로 불린다고 설명했다. 수모내가 있는 경주시 양북면 일대에는 승병의 본거지로 알려진 기림사(祇林寺)가 있다. 문무대왕면(양북면) 함월산에 소재한 기림사는 구한말 갑오경장(1894년)으로 승병이 공식적으로 해체될 때까지 승병 184명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승병은 신라 때 왜군을 방어하기 위해 창설된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의 대몽항마군, 임진왜란 때의 승병 활동이 각종 문헌에 남아있다. 그곳이 기파랑이 화랑과 낭도들을 훈련한 곳이며, 찬기파랑가의 배경으로 보인다. 기림사는 경주시 감포나 봉길해안에 상륙한 왜군이 경주를 침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나와야 하는 좁은 협곡에 위치한 군사적 요충지다. 기림사는 선덕여왕 12년(A.D. 643년) 인도 천축국의 광유스님이 인근의 골굴암과 함께 임정사로 창건했다. 이후 원효스님이 중수하고 기림사로 개칭했다. 기림사 뒤편으로는 근래 경주시가 토함산 석굴암까지 이어지는 ‘왕의길’을 조성했다. 왕의길은 깎아지른 협곡을 끼고 가다가, 폭포가 나오고, 산 중턱의 재를 서너 번 넘어가는 코스다. 그곳을 산행하다보면, 빽빽한 잣나무 숲에서 기파랑과 낭도들의 고함이 들리고, 이파리 사이로 그들의 모습이 어른거리는 상상에 빠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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