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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核)무기 개발의 원죄, 삼중수소 (Ⅱ)
정현걸 칼럼니스트, 소설가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21년 05월 10일(월)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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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경북연합일보 | 필자는 지난 칼럼에서 우리나라도 마음만 먹으면 핵무기 개발이 언제든 가능하다고 밝힌 바 있다. 핵폭탄 제조 잠재력이 세계 10위권이고, 월성원전에서는 매년 준무기급 플루토늄이 생산되고 있고, 폐연료봉을 재처리하면 무기급 플루토늄 26t을 얻을 수 있으며, 게다가 수소폭탄 제조에 필요한 중수소와 삼중수소도 상당량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때 원자폭탄의 막강한 위력을 전 세계에 과시한 미국은 1952년에 최초로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했다. 이에 질세라 소련도 1년 뒤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했다. 그러자 미국은 슬그머니 원자력의 평화적 사용을 선언했다. 미국과 소련은 경쟁적으로 서로의 우방국, 동맹국들에 원자력발전소 기술을 팔아먹기 시작했다. 미국은 일본에 원전기술을 제공한 데 이어서 한국과 1956년 원자력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면서 미국과 소련은 수소폭탄을 탑재하여 발사할 수 있는 ‘미사일’ 개발에 몰두했다. 소련이 미국보다 2년 앞서 1957년 장거리미사일(대륙간탄도미사일) 개발에 성공했다. 연이어 소련은 두 달 후에 인류 역사상 최초로 인공위성 발사에도 성공했다. 충격에 휩싸인 미국은 1958년 미사일과 핵무기를 남한에 배치하여 북한과 소련의 위협을 막으려 했다. 1959년 서울대에 원자력공학과가 개설됐다. 아마 이승만 대통령은 원자력 기술을 이용하여 핵무기를 만들려는 속셈을 지녔을 것이다. 일본이 1963년부터 원전을 상용화하자, 박정희 대통령도 원자력발전소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1971년 3월 경남 동래군(지금 부산 기장군)에 1976년 준공을 목표로 ‘고리원전 1호기’ 건설이 시작됐다. 1970년 초, 박 대통령은 북한이 지대지(地對地) 유도탄과 잠수정을 자체 개발해 보유하고 있다는 보고는 받고 나서 자주국방 실현을 위해 핵무기 개발을 지시했다. 그때부터 국방부는 비밀리에 핵무기 개발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1972년 정부는 프랑스로부터 연구용 원자로 구입을 시도했다. 핵연료 재처리시설을 통해 우라늄을 재활용하기 위해서였다. 재처리시설이 있으면 핵탄두를 만들지 않아도 핵무기 생산은 언제든 가능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프랑스 생고뱅사와 계약을 성사시킴과 비슷한 시기에 캐나다와 중수로 계약을 체결했다. 월성1호기 건설을 맡겨주면 3만㎾급 실험용 원자로(NRX)를 끼워주겠다고 조건 때문이었다. 원자폭탄 원료인 플루토늄을 뽑아내기 쉬운 중수로형인 데다 미국의 방해 또는 개입으로 프랑스와의 계약이 취소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보험을 든 것이다. 그러자 미국은 한국이 허락도 없이 핵개발을 하려 한다는 눈치를 챘다. 동북아의 평화가 위협받는다는 빌미로 미국은 한국 정부에 압력을 넣었다. 1975년 3월, 한국 정부는 핵확산금지조약(NPT)을 맺었고, 3월 20일 국회에서 토론도 없이 핵확산금지조약 비준안에 동의했다. 미국은 프랑스에도 압력을 넣어 재처리시설 판매를 못 하게 했고, 청와대에도 대표단을 보내 “핵 개발 계획을 포기하지 않으면 3억 달러에 달하는 차관 제공을 취소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그때부터 미국은 한국에 대한 핵 사찰을 대폭 강화했다. 박 대통령은 공식적으로는 핵무기 개발을 포기했다. 그 대가로 한반도에서의 주한미군과 핵무기의 철수를 막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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