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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의 생사관
정석준 수필가, 법사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21년 05월 06일(목)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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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경북연합일보 | 흔히 사람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고 하거니와, 자유의지가 작용할 수 있는 범위 밖에서 결정되는 것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많다. 우리가 태어난 것은 자유의지로 결정한 일이 아니며, 언젠가 닥쳐올 죽음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는 국가·민족·향토·가족을 선택할 권리가 없으며, 소질이나 건강 따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자유의지나 힘으로는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이런 것들을 우리는 운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운명은 언제나 우리에게 있어서 공포의 대상이 되어 왔거니와, 그것에 대처해 가는 사람의 태도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어 왔다. 그 하나는 그것을 신(神)의 섭리로 받아들이는 태도이니, 기독교 같은 것은 이에 속한다 하겠다. 그러나 장자는 그것과 다른, 자연으로 돌리는 길을 선택하였다. 그는 자연을 천지 만물을 생성하고 사멸시키는 원인으로 보았다. 자연을 조물자(造物者)로 부를 때, 그것이 인격신의 발견이 될 수 없을 것은 명백하다. 왜냐하면 신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다면, 그것은 이미 자연일 수 없는 까닭이다. 신의 창조와 지배는, 저절로 그렇게 된 것〔즉 자연〕과 는 정반대의 것이 될 수밖에는 없지 않는가? 이런 자연은 신과 다를 뿐 아니라, 그 자체가 존재한다고 조차하지 못할 것이다. 어딘가에 존재한다면, 거기로부터 힘이 나와서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 되므로 자연의 개념과 모순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것은 ‘작용없는 작용’이라고나 해야 되리라. 그러므로 장자가 그 존재론(存在論)에서 유(有)의 원인을 무(無)로 돌리는 것도, 거기에 이유가 있다고 보아야 되겠다. 이렇게 자연이 저절로 움직이는 것, 바꾸어 말하면 그 작용없는 작용이 무위(無爲)의 뜻이라고 생각해도 된다. 그렇다면 이런 자연의 필연성에 주목할 때, 우리들이 살아갈 길도 자명해질 것이다. 그것은 인위를 버리고 자연에 순종하는 일, 환언하면 무위가 되는 일이다. 장자가 말끝마다 무위를 강조하는 것도, 차별적 세계에서의 이탈과 함께 자연에의 순종을 요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를 지배하는 운명 중에서 가장 가혹한 것은 죽음이다. 그것은 생의 종식을 뜻하는 까닭에, 어떤 무엇보다 우리의 현존재에 있어서 위협이 된다. 모든 종교의 목표가 사실은 이 죽음의 해결에 있었던 것이 사실이며, 장자에 있어서도 사정은 만찬가지다. 그는 “만물은 도(道)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모두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는 만물제동(萬物齊同)을 주장한 철학자이다. 모든 차별이 부정되어야 한다면, 생사의 차별 또한 스러져야 옳을 것이다. 장자에 따르면 본체로서의 무, 즉 도는 우주 내의 어떤 사물에든지 존재한다. 만물은 도에서 생겨나고, 다시 도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진정 도를 깨닫는 사람은 삶을 기뻐하거나 죽음을 싫어하지 않으며, 성공을 과시하거나 실패를 탓하지 않으며, 억지로 일을 꾸미지도 않는다. 사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서 한쪽의 완성은 한쪽의 파멸을 뜻하기 때문에 전체적 질서에는 변함이 없다. 사정이 그러하거늘 인간의 생사화복에 그토록 집착할 필요가 있겠는가? “모든 것을 차별 없이 긍정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생을 기뻐하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고 어찌 말할 수 있으랴. 반대로 죽음을 싫어하는 사람이란 어려서 고향을 떠난 자가, 고향에 돌아가는 일을 잊고 있는 것과 비슷하지 않겠는가?”(제물론 편). 장자의 아내는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죽고 말았다. 이때 친구 혜시가 조문을 왔는데, 장자는 두 다리를 뻗고 앉아 물동이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를 보고 혜시가 말했다. “그대는 지금까지 아내와 잘 살아왔고 그래서 애정도 두터울 터인데 노래를 부르고 있다니, 이것은 너무하지 않은가?” 이에 장자는 이렇게 답했다. “그것이 아닐세. 나도 처음에는 놀라고 슬퍼서 소리 내어 울었다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가소롭기 짝이 없지 않은가? 왜냐하면 그녀는 본래 삶도 없고, 형체도 없고, 그림자조차 없었지 않은가? 그러다가 어느 날 큰 혼돈 속에서 음양의 두 기(氣)가 일어나 형체를 이룸으로써 그녀에게 비로소 삶이 주어졌네. 그리고 이제 삶에서 다시 죽음으로 돌아갔거늘, 이것은 춘하추동의 변화와 똑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아마 내 아내는 지금쯤 천지(天地)라고 하는 한 칸의 큰 거실 안에서 단잠을 자고 있을 걸세. 그런데도 내가 소리를 치고 통곡을 하며 운다면, 천지간에 얼마나 불행한 사람이 되겠는가?” 그는 또 어느 소녀가 진(晋)으로 끌려갈 때는 슬퍼서 울었는데, 막상 거기 가서 왕을 모시는 몸이 되어 부귀를 누리자, 자기가 왜 처음에 그렇게 슬퍼했는지 뉘우쳤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죽음의 세계로 가보면 의외로 즐거울지 모른다고 하기도 했다. 원래 삶이 있으니까 죽음이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삶과 죽음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그 하나를 취하고 다른 것을 버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리고 둘이 다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인 바에는, 삶이라고 기뻐할 것도 아니요, 죽음이라 해서 싫어할 것도 아니라는 것이 장자의 생사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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