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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가순례 1 - 그리워하는 마음의 갈 길‘모죽지랑가’
강병찬 본지 취재국장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21년 05월 02일(일)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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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경북연합일보 | “간 봄 다이매(가는 봄이 다함에) / 모든 것이야 울 이 슬픔 / 아름다운 얼굴 좋으신(아름다움 나타내신) / 모습이 세월감에 허물어지는구나 / 눈 돌릴 사이에(때) / 만나보기를(어찌) 이루리 / 낭이여! 그리워하는 마음의 갈 길 / 다북쑥 우거진 마을에 잘 밤 있으리.(이임수 현대역)”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는 죽지랑의 휘하에 소속된 득오라는 젊은 낭도가 부산성의 창고지기로 차출돼 가자 죽지랑이 그를 면회하고 휴가를 얻어줬다는 배경설화와 함께 삼국유사에 기록돼 있다. 죽지랑은 137인의 무리와 함께 의장을 갖추고, 작별인사도 없이 갑자기 부산성으로 차출돼 간 낭도 득오를 찾아갔다. 득오가 차출된 것은 강제징집의 의미로 보인다. 상황이 예사롭지 않다. 휘하 젊은 낭도를 면회하기 위해 많은 무리를 이끌고 전직 대장군이 직접 찾아갔다는 것은 정치적 세력다툼의 의미로 읽힌다. 죽지랑은 삼국통일을 이룩한 김유신 장군의 부장수였다. 급하게 득오를 찾아간 죽지랑은 득오를 갑자기 징집해 간 아간 익선과 첨예한 의견대립을 보였다. 그러나 익선은 끝내 죽지랑의 휴가 부탁을 거절했다. 이는 신라의 공적인 지휘체계와 화랑도와의 위상대립으로 이해된다. 그때 마침 세금 운반차 그곳을 지나가던 사리(使吏) 간진이 세곡 30석을 익선에게 내어줬다. 그 세곡을 뇌물로 보는 설이 있으나, 고대국가에서 세곡을 병영에 공개적으로 내어주는 것을 불법으로 단정하기 어렵다. 당시의 조세출납제도가 명확하지 않다. 지방에서 징수된 현물 조세를 중앙으로 옮겼다가 다시 내려보내는 방법보다는 세곡을 병영이나 관아에서 취하고, 장계 등을 이용해 정산하는 방식이 쓰일 수 있다. 이어 또 다른 조세 담당 관리인 진절 사지(舍知)가 자신의 말안장을 익선에게 줬고, 그제야 득오는 익선에게서 휴가를 받아내게 된다. 익선이 세금이 아닌 개인의 귀중품을 받아 챙긴 것으로 보인다. 이 대목에서 간진과 사지는 죽지랑의 인품의 고매함을 흠모해 그 같은 행동을 한 것으로 읽힌다. 특이한 것은 죽지랑은 전직 대장군으로서 어떠한 강압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사실이 나중에 조정의 화주(花主)에게 알려졌다. 그러자 조정은 연좌를 적용해 익선이 도망하자 그의 아들을 얼려 죽이고, 익선의 거처인 모량리 전체를 피점령지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벌을 내렸다. 화랑도는 통일신라 초기에 조정의 공식 편제는 아니었다고 짐작된다. 그러나 화랑도는 규칙적으로 유지됐고, 조직은 굳건히 작동됐다. 조세를 맡았던 조정 관리들조차 화랑도를 정신적·실질적 상급기관으로 대했다. 국왕은 결국 지방 관리의 화랑 폄하와 뇌물 건 등을 처벌하게 되는데, 직권남용이나 뇌물죄 이상의 반역죄에 준하는 엄벌을 내렸다. 득오가 그러한 상황을 추억하며 죽지랑의 고매한 인품을 사모하고 찬양하는 서정 향가를 지은 것이 모죽지랑가다. 모죽지랑가와 배경설화는 당시의 사회상을 알려주는 귀중한 사료 외에도 그 표현과 서정이 너무나 빼어나 한국인들의 심금을 울린다. 득오가 모죽지랑가를 지은 배경인 부산성은 경주시 건천읍에 있다. 신라시대 서쪽의 적을 방어하느라 석축으로 둘러싸인 천연요새다. 산의 정상을 중심으로 세 줄기의 골짜기를 따라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이용해 쌓은 석축성이다. 대한민국 사적 제25호로 지정됐으며, 둘레는 4,977m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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