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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석정(鮑石亭) 애가(哀歌)
강병찬 본지 취재국장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21년 04월 25일(일)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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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경북연합일보 | 대한민국 사적 제1호, 경주 포석정지(鮑石亭址)는 무엇을 하던 곳이었을까. 경애왕은 그곳에서 죽임을 당했을까 자결했을까. 같이 붙잡힌 왕비는 정말 능욕을 당했을까. 경애왕이 죽기 전에 그곳에 피신해서 제사를 지내고 있었을까. 적군이 쳐들어오는 것도 모른 채 끝없는 환락을 즐기고 있었을까. 포석정은 경주 남산에 있으며, 신라의 이궁(離宮, 별궁 내지 행궁) 터로 확인되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된 경주 남산은 매우 신성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포석정은 남산의 수많은 유적 중에서 이름, 역사, 주변 경관 등을 견줘 가장 신비해 비길 데가 없다. 오릉에서 가면, 나정(蘿井)에서 1km 남짓 떨어진 서남산 초입에 위치한다. 남산의 정상부에서 길게 뻗어 나온 포석골의 맨 아래에 터를 잡고 있다. 포석정에서 정상부로 이어지는 넓고 완만한 등산로 주변에는 소나무를 비롯한 삼림이 울창하다. 그러나 요새 관광 취향이 화려하고 거창한 곳 위주로 바뀌면서 포석정의 이미지는 이전보다 상당히 퇴색됐다. 거기에는 일제강점기에 형성된 그릇된 역사관도 한몫하고 있다. 포석정은 역사 문헌을 통해서 통일신라시대의 연회장소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1998년 조사 때 근처에서 상당한 유물과 함께 제사에 사용되는 그릇들이 출토됐다. 따라서 이곳이 신라 왕실의 이궁이자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며 제(祭)를 행하던 신성한 곳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런데도 포석정이 왕과 귀족들이 궁녀들을 데리고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즐기던 환락의 상징적 장소라는 고정관념은 변하지 않고 있다. 각종 유물이 출토돼 실체가 드러났는데도 참된 의미가 바로잡히지 않는 것은 여전히 친일사관의 오류에 머무르고 있다는 증거다. 포석정은 63개의 돌을 이어붙인 '돌홈(곡수거)'이 결코 아니다. 신라 돌홈이 귀중한 문화재인 것은 사실이지만, 돌홈은 이궁을 위한 부대시설일 뿐이다. 이궁은 국가적 제사, 각종 연회, 방어, 휴양 등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경애왕이 후백제군에 쫓겨 왕비와 함께 포석정으로 피신했다는 것으로 보아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사시사철 환락을 즐기다가 신라가 패망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경주시와 문화재청은 이제라도 포석정에 대한 장소적 정의를 ‘신라이궁’으로 바로잡아야 한다. 그래서 포석정을 신라 돌홈 보존 수준에서 벗어나 신라이궁 복원 차원에서 그 일대를 대대적으로 재조사하고,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임금이 적장에게 붙잡히던 날/포석정(鮑石亭) 술잔에 피가 고였다/황금관은 칼이 되었고/금과대는 사슬이 되었다/용포(龍袍)는 찢기어졌고/적의(翟衣)는 벗기어졌다 // 포석정이 무뢰배에게 짓밟히던 날/골품 뼛속에 수치가 박혔다/신하는 충절을 던져버렸고/병졸은 창칼을 내다 버렸다/관복은 무명옷이 되었고/군복은 누더기가 되었다 // 천년왕국이 속절없이 스러지던 날/저녁 해는 서녘을 비추지 않았다/임금은 칼에 맞아 죽었고/왕비는 능욕을 당했다/신하는 구(狗)가 되었고/병졸은 엽(葉)이 되었다 // 삼한일통이 무참히 무너지던 날/포석정은 눈물마저 메말라 버렸다/잔치는 아비(阿鼻)로 변했고/풍류는 규환(叫喚)이 되었다/삼국은 또다시 쪼개졌고/마음은 갈가리 갈라졌다 // 포석정에 다시 돌을 잇대던 날/마른하늘에 촉촉이 단비가 내렸다/상수리나무를 옮겨 심었고/솔숲을 빽빽하게 가꾸었다/종묘(宗廟)를 헌납했으나/사직(社稷)을 곧추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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