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유교의 생사관
정석준(수필가, 법사)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21년 04월 11일(일) 16:29
|
|
 |  | | | ⓒ 경북연합일보 | 유교를 하나의 종교라기보다는 정치철학이나 사회적 윤리규범으로 취급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그것은 유교가 특정한 교조를 정점으로 조직된 교단이라든가 예배 의례의 중심으로서의 사원, 그리고 전문적인 종교기능 담당자로서의 사제계급 따위의 종교적 조직체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교리의 측면에서도 신 개념이나 내세관 등이 미약하기 때문이다. 유교에서 인간의 생사(生死)를 바라보는 기본 관점은 ‘관혼상제(冠婚喪祭)’에서 찾을 수가 있다. 관(冠)은 이른바 성인이 될 때 치르는 의식(成人式)이며, 혼(昏, 婚)은 성인이 된 자들이 혼인할 때 치르는 의식(혼례식)이다. 반면에 상(喪)은 죽은 자를 묻는 의식(상례)이며, 제(祭)는 죽은 자를 추모하는 의식(祭禮)이다. 이러한 의식을 두고 볼 때, 인간은 개체로서 단 한 번밖에 없는 삶, 즉 일생(一生)을 갖는다.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이치이다. 공자가 “죽고 사는 것에는 명(命)이란 것이 있고 부귀는 하늘에 달렸다”라고 한 말은 삶과 부귀가 모두 하늘에 의거한 것임을 보여준다. 이 삶의 본래 모습은 하늘이 “그렇게 있어라”고 명한 것이다(天命之謂性). 명(命)이란 주희(朱憙)의 말대로 ‘명령 〔 令〕 과 같은 것’이며, ‘사물이 생겨나는 시초에 받은 것’이다. 그것을 천명(天命)이라고 한다. 천명은 하늘의 뜻, 곧 하늘의 의지인 것이다. 하늘의 도리에 따르는(順天) 삶은 이생(二生)·삼생(三生)·사생(四生)이 있는 것이 아닌, 단 한 번의 삶과 죽음이 있는 일생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람을 포함하여 살아있는 모든 것은 반드시 죽으며,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유교에서 사람의 일생의 근간은, 삶 속에 관과 혼을 포함시켜서 고려하면 결국 ‘삶→장례→제사’의 틀이다. 그리고 그 틀은 공자가 “살아 계실 때에도 예로써 섬기며, 돌아가신 뒤에도 예로써 장사 지내며, 제사 지낼 때에도 예로써 한다”고 한 것처럼, 바로 예(禮)로써 일관되어 있다. 유교의 가장 이상적인 삶의 모습은 바로 예악에서 노니는 것(遊於禮樂)이다. 일생을 예악에서 그 진정한 의미를 찾고자 하는 유교를 ‘신성한 예식을 통한 인간의 공동체’라는 평가도 가능하다. 그런데 인간은 관혼상제 가운데서도 누구나 상례(喪禮)는 거쳐야 한다. 성인식〔 冠〕·혼인식〔婚〕·제사〔祭〕는 경우에 따라 생략이 가능하지만 장례식을 하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다. 장례야말로 일반 사람들의 생활에서 모든 예의(禮儀)의 중심이라 할 수 있다. 예라는 것은 구체적인 행위이므로, 이른바 장례에서 예제의 사고 법, 예제의 구성, 예제의 차례라는 것이 관혼상제 등 다른 예제 구성의 모범 혹은 단위, 표준이 된다. “돌아가신 부모에 대해 신중히 예를 다하고, 이미 죽어서 멀어진 분들 〔조상들〕을 잘 추모하면 백성들의 덕이 두터운 데로 돌아갈 것이다” 는 증자(曾子)의 말은, 삶의 있어야 할 올바른 방향을 삶 그 자체에서 구하기보다는 장례와 제사를 통해서 얻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육신의 죽음이란 것을 통해서 터득된 유교 측의 지혜는 ‘효(孝)’라는 덕목이다. 효의 원리는 중국뿐만 아니라 중국사상의 영향을 받고 있는 동아시아 사회 전반의 문화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효는 꼭 유교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강약의 차이는 있지만 유교 이외의 다른 사상들, 즉 불교와 도교에도 널리 퍼져 있는 사고방식이라 볼 수 있다. 『예기(禮記)』 제의편(祭儀篇)에서 증자는 “몸이라는 것은 부모의 유체(遺體)이다. 부모의 유체로 행동하니 감히 공경스럽게 다루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나의 몸은 곧 부모의 생명을 물려받은 것이다. 그래서 나의 몸=부모의 유체를 다음 세대에 훼손없이 물려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유교에서 본다면 부부의 결합에 의해 자손이 이어지는 것. 그리하여 대를 이어가는 것은 ‘부모의 유체’로 공경스럽게 행동하는 과정이자 결실인 것이다. 본처가 아이를 낳지 못할 때 양자를 들이거나 또는 씨받이를 통해서 혹은 첩을 통해서라도 대를 이를 아이를 낳고자 하는 것은 일회적인 삶의 연속성을 위한 집요하고도 대단히 이기적인 노력이었다. 대를 잇는 자식은 나의 유체이므로 자식이 존재한다는 것은 곧 나의 영속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렇게 나를 영속시키고자 하는 발상은 유교의 현세 긍정적인 태도와도 연관된다. 즉 유교의 인생관은 기독교와 같이 원죄의식에 입각해 있지 않고, 『대학(大學)』 의 3강령(三綱領) 중의 하나인 ‘밝은 덕을 밝힌다(明明德)’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미 있었던 선한 본성의 낙원을 찾는 원선의식(原善意識)에 근거해 있다. 이것은 삶을 주어진 그대로 긍정하고 즐기려는 안빈낙도나 낙천명(樂天命)의 태도라 하겠다. 사후의 세계(저승〕보다는 일상일용의 현세〔이승〕 를 긍정하는 유교에서는 사후의 세계를 고민하기보다는 ‘지금 여기’의 현세에 늘 관심을 두고 있다. 즉 죽고 난 뒤에도 후손들이 지금·여기에 자신의 넋〔魂〕을 불러주어 돌아오는 것, 즉 초혼재생은 제사로써 근간을 유지한다.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 즉 자식들(그 중에서도 아들)이 자신이 죽고 난 뒤에 그 넋을 기리고 불러줌으로써 즐겁고 아름다웠던 이 세상에 다시 돌아올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다름 아닌 효의 주요한 표출이자 일회적 삶의 영속성을 보장하는 주요 기제였던 것이다.
|
|
|
경북연합일보 기자 - Copyrights ⓒ경북연합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
|
|
|
|
|
|
|
|
실시간 많이본 뉴스
|
|
|
|
|
최신뉴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