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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분황사 모전석탑’의 복원을 고대함 (중)
강병찬 본지 취재국장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21년 03월 14일(일)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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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경북연합일보 | | 국보 제 30호 모전석탑의 복원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모전석탑을 품고 있는 경주 분황사를 살펴보자. 분황사는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3년(서기 634년)에 지어진 절이다. 원효대사가 거주하면서 화엄경소 등 수많은 저술을 한 곳이다. 또 선덕여왕의 권유로 자장법사가 머물렀다. 최초의 우리글인 향찰을 만든 설총은 부친인 원효대사가 돌아간 후 분황사에 그의 소상을 만들어 모셨다. 그 소상은 고려 후기까지 있었다. 또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은 신화로 알려질 만큼 유명했다. 아쉽게도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경덕왕 14년(755년)에는 불상 주조의 대가인 강고내말이 약사여래상을 만들었다. 그 약사여래불은 30만 6700근의 무게만큼 장엄했다. 현재 분황사 보광전에는 조선 영조 때에 만든 약사여래입상이 강고내말의 약사여래불이 사라진 빈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다. 수많은 문화재들을 잃어버린 천년고찰 분황사. 하지만 모전석탑을 비롯해 화쟁국사비석대, 석정, 석조, 초석, 석등, 대석과 사경 이외에 당간지주가 여전히 남아 있다. 그것만으로도 그 가치가 높게 평가되고 있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또 석탑기단 위 4구의 돌사자들도 삼국시대의 조각양식을 잘 보여주며 위풍당당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나머지 돌사자 2구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다. 화쟁국사비는 원효대사를 기리는 비로 고려 숙종(1101년)때에 세워졌다. 현재는 비신을 받쳤던 비대좌만 남아 있다. 비대 좌우에 추사 김정희가 쓴 ‘차신라화쟁국사지비적’ 이라는 글씨가 희미하다. 분황사 석정은 신라시대에 만든 것으로 우물 바깥 모양은 팔각으로 되어 있고 내부는 원형이다. 팔각모양은 불교의 ‘팔정도’를, 원형은 원불의 진리를 상징한다고 한다. 남아 있는 신라 우물 가운데 가장 크고 우수하다고 평가된다. 석정은 ‘삼룡변어정(三龍變魚井)’이라고도 불린다. 이 우물에 세마리 호국룡이 살고 있었는데, 795년(원성왕 11년)에 당나라의 사신이 이 용을 세 마리의 물고기로 변신시킨 뒤 잡아서 길을 떠났다. 하루 뒤에 두 여인이 원성왕 앞에 나타나서 사실을 아뢴 뒤 남편을 찾아줄 것을 호소했다. 왕이 사람을 시켜 당나라 사신을 쫓아가서 빼앗아다 우물에 놓아주고 다시 살게 했다는 스토리 때문이다. 이후 분황사는 몽고의 침략과 임진왜란 등으로 인해 크게 손상을 입었다. 임진왜란 당시에 왜군들이 모전석탑을 반쯤 헐었다고 한다. 그 뒤 절의 승려들이 탑을 다시 쌓기 위하여 헐었더니 바둑알만한 작은 구슬이 출토됐다. 그 구슬들은 수정처럼 빛나고 투명했으며, 태양을 쪼여 솜을 가까이 대면 불길이 일어났다. 당시 그것을 백률사(栢栗寺)에 보관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는 일본인들이 모전석탑을 해체 수리했다. 수리 당시에 2층과 3층 사이에 들어있던 석함(石函) 속에 있던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가 발견됐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돼있는 이들 사리구는 지금까지 고대탑 내부에서 발견된 것들 중 가장 많은 종류와 수량을 자랑한다. 이 밖에도 분황사에는 석등, 대석과 많은 초석들이 남아 있고 1974년 발굴조사에서 금동보살입상과 귀면와(鬼面瓦), 신라 및 고려시대 와당 등이 발견됐다. 분황사는 경주역사유적지구에 포함돼 200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이처럼 경주 분황사는 유형문화재의 보물창고일 뿐만 아니라 역사, 종교, 문학, 예술, 행정 등 인문학의 보고다. 그렇기에 분황사의 상징인 모전석탑을 ‘신라삼보(新羅三寶)’ 라고 해도 결코 손색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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