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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金剛經) -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21년 01월 20일(수)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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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정석준
수필가, 법사 | | ⓒ 경북연합일보 | ‘대승경전’ 중에서 가장 일찍 나타난 것이 ‘반야경’이다. ‘반야경’은 ‘반야바라밀디경’의 약칭으로, 많은 크고 작은 경전군(經典群)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에는 400권으로 이루어진 ‘대반야’도 있거니와, 비교적 짧은 것 중의 하나가 ‘금강경’으로. ‘대반야경’ 제577권 능단금강분(能斷金剛分)을 번역해 별도의 단경으로 만든 것이다. ‘금강경’의 주제는 보리심(菩提心)으로 ‘보리심을 어떻게 일으키고 간직하며 다스릴 것인가’(제2분)에 있다고 할 것이다. 즉 부처님의 십대제자 중 공사상에 가장 밝은 해공제일(解空第一)의 수보리존자가 부처님께 “세존이시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위 없는 바른 깨달음의 마음)을 낸 선남자 선녀인들의 마음 자세는 어떠해야 하며(어떻게 수행해야 하며),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라고 질문하였다. 이것이 테마가 되어 붓다의 설법이 진행되어갔다. 붓다는 부주심(不住心), 즉 집착하지 않는 마음을 가지도록 주장했다. 물론 보살은, 중생을 구제하고자 지향해야 하거니와, 설사 무수한 중생을 구제했다 해도, 사실은 어느 한 사람도 구제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보살에게는 ‘나’라는 관념이나 ‘중생’이라는 관념이 없는 까닭이다. 즉 누구를 구제한다는 의식이 없이 구한다는 것이다. 즉 무분별(無分別)의 지혜, 즉 반야에 입각해서 행동하고 있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의식하면서 구제하는 것은 진정한 구제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또 우리가 보시(布施), 즉 남을 물질로 돕는다 할 때도, 돕는다는 의식을 떠나야만 진정한 보시가 된다. 이런 논리를 확대하여 적용시켜 가면, 붓다란 붓다가 아닌 것이라는 말이 된다. 붓다는 자기가 붓다라는 의식이 없는 까닭이다. 붓다가 얻었다는 최고의 진리란, 최고의 진리가 아닌 것이 된다. 이것이 최고의 진리라는 집착이 거기에는 없는 까닭이다. 아니 얻었다고 할 수도 없다. 얻었다는 의식이 없이 얻은 까닭이다. “수보리야 네 뜻이 어떠하냐. 여래는 법을 설한 바가 있었느냐, 없었느냐”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설하신 바가 없었습니다” 붓다는 수 십 년에 걸쳐, 거의 하루도 쉬지 않고 법을 설했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고, 현재도 금강경을 설법하고 있는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보리는 ‘무소설’이라 대답했다. 붓다는 설법한다는 의식 없이 설법했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씨를 요구한 말에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이라는 문구가 있다. 선종의 6조(六祖)가 ‘금강경’의 이것을 듣고 깨달았다, 해서 유명하며, 그 후 선계통의 사람들 사이에서 많이 회자된 문구다. ‘집착하지 않은 마음을 일으키라'는 뜻이다. 즉 무분별의 지혜, 반야를 발휘하라는 말이다. ‘반야경’에서는 깨달음에 이르는 여섯 가지 방법이 있다고 보고, 이것을 ‘육바라밀’ 또는 ‘육바라밀다’라 일컫는다? 그것은 반야에 의해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을 말하는 바, 반야야 말로 바라밀의 근본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무분별지에 서지 않는 한 보시도, 지계도…모두 진정한 것이 될 수 없는 까닭이다. ‘금강경’의 내용 가운데에는 수차례에 걸쳐 4구게(四句偈)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4구게야말로, 이 경전 전체의 내용을 함축적으로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제1구>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하니 모든 형상을 형상이 아닌 것으로 보아야 부처를 볼 수 있다.(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제5분) <제2구> 형상에 집착치 않고, 소리·향기·맛·촉감, 그리고 어떤 진리에도 집착치 않아야 깨끗한 마음이 생긴다.(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無所住 而生其心, 제10분) <제3구> 만약 형체로써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구하려 한다면 이는 삿된 도를 행하는 것이니 나를 볼 수 없다.(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제26분) <제4구> 모든 생멸법은 꿈·허깨비·물거품·그림자 같고, 이슬 같고 또 번개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보라.(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제32분)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이런 ‘금강경’의 주장이, 사실은 ’원시경전’에 보이는 연기설에서 흘러나온 사상이라는 것이다. 모든 것은 어떤 조건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따라서 그것은 고정·불변하는 존재가 아니라 무상한 것들이었다. 이런 사상에 임하는 한 모든 집착을 떠나라는, 자기의식까지도 버리라는 요구는 응당 나올 만한 일이다. ‘대승경전’이 붓다의 직접 설법한 내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붓다의 취지를 살렸다고 보는 이유가 이런 데에 있다. 그리고 이런 주장이 사실은 공(空)의 사상에 틀림없음을 알게 된다. 사실 다른 ‘반야경전’에서는 주로 이 공이 다루어졌고, 이에 비해 ‘금강경’에서는 공이라는 말이 한 번도 안 나오는 터이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똑같이 공을 다룬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이 안 보이는 것은 ‘금강경’이 ‘반야경전’중에서 비교적 일찍 성립한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경은 간략하면서 공의 도리를 잘 나타내고 있는 까닭에 많이 읽혀 왔고, 우리나라의 조계종 같은 데서도 이것을 소의경전(所議經典)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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