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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대왕신종 송가(頌歌)
강병찬 취재국장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21년 01월 06일(수)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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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경북연합일보 | | 서라벌 옛터는 평화가 이어지고 풍요가 넘쳐난다. 세계 만방에서 서라벌의 아름다운 자태를 흠모해 화관을 들고 찾아온다. 신혼 부부들은 보문단지에 신방을 꾸미고, 호숫가를 거닐며 사랑을 속삭인다. 아이 딸린 아버지는 동해 대왕암을 찾아 해돋이의 장관을 보며 웅혼한 기상을 아이들에게 가르친다. 그러나 서라벌 옛터에 아쉬움 하나가 있어 뼛속에 사무친다. 우리 민족 심금을 울렸던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 국보 제29호)이 1250년 세월의 풍상이 고단해 그 울림을 그치니 참으로 허전하고 애석하다. 성덕대왕신종이 처음 울렸던 771년 봉덕사에서 한 현자는 “큰 산이 우뚝 서고 용울음 소리 나서 하늘에 다다르고 지옥에 스며드니, 본 이는 기이해했고 들은 이는 복 되었다”고 예찬했다. 신종은 원나라 침략과 왜구 노략질도 거뜬히 이겨냈다. 조선 초에는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 화가 미쳐 녹아 없어질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세종 대왕이 ‘성덕대왕 신종은 나라의 보배이니 남겨두라’는 어명을 내려 보존됐다. 그러나 조선 중기 대홍수로 봉덕사 가람이 큰물에 쓸려가 버렸다. 신종은 수풀 속에 덩그러니 방치돼 상당한 시간을 보냈다. 신종의 명문(銘文)이 그 때 훼손돼 식별이 다소 아련해졌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인(日人)들이 ‘종소리에 아기울음소리가 섞여있다’고 왜곡하며 성덕대왕신종을 ‘에밀레종’으로 폄훼했다. 신종은 1975년 경주 인왕동 소재 국립경주박물관 경내로 옮겨졌다. 그 때 10만 군중이 천천히 이동하는 신종을 뒤따라 장관을 이뤘다. 그러던 신종이 1992년 제야(除夜) 후 타종이 금해지니 새해아침은 적막해졌고 사람들 마음은 허전하기 그지없다. 신종이 소리내기를 멈추니 봄꽃은 지고 여름해는 기울었다. 신랑 신부의 사랑은 식어갔고 아이들 동심은 순수를 벗어났다. 창공에 찬란했던 햇빛은 연무에 가려 희미해졌고 땅이 흔들려 백성이 당황했다. 하늘이 노했는지 현자에게 주던 예지와 재주꾼들에게 불어넣던 기예도 메말라갔다. 심지어 오만한 고관은 민초 살피기를 게을리한다. 관조차도 바닥 일꾼들 품삯을 박하게 주는가 하면, 서민이 사업으로 입에 풀칠하기도 마뜩잖다. 부자는 빈자를 업신여기며 우려먹기에 열을 올린다. 정조로 가정을 지키려는 부부와 신의로 우정을 지키려는 벗이 눈에 띄게 드물어졌다. 청년과 소년들은 기개와 이상을 버린 지 오래됐다. 이제 우리 심장을 풀무질해 청동을 녹여보자. 정교하게 틀을 짜 쇳물을 붓자. 용뉴를 매달고 음관(音管)을 세우자. 종명(鐘銘)을 조각(彫刻)하고 비천상(飛天像)을 양각(陽刻)하자. “천문(天文)이 걸리고 방위(方位)가 열리고, 산하가 자리 잡고 천하가 나뉘고, 신선이 동해에 드니 복사꽃이 만발한다. / 경계는 해 뜨는 곳 아득하게 닿았고, 우리나라 여기 있어 한 고을로 합했고, 성인의 위대한 덕이 드물도록 새롭다. / 맑은 교화(敎化) 오묘하여 원근에 이르고, 은혜는 멀리 미쳐 골고루 나뉘었고, 자손은 무성해지고 온갖 동포 안락하다” 이제 강퍅(剛愎)한 우리의 심정을 잘디잘게 부숴야 한다. 그렇게 평평해진 우리의 마음 판에 신종의 명문을 아로새겨야 한다. 그리고는 신뢰와 배려의 새 마음을 불러올리고, 통일의 염원을 담아서 마음에서 우러난 성덕대왕 신종의 소리를 동해 너머 온 세상에 울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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