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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亂中日記)’다시 읽기
강병찬 취재국장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20년 12월 20일(일)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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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경북연합일보 | | 요새같이 삶이 힘들고 어려울 때 동네 책방을 찾아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亂中日記)를 골라 베갯머리에 두고 읽어보자. 한산도와 명량과 노량 앞바다를 바람같이 휘저으며, 왜적을 초토화한 장군의 무용담은 청량 음료보다 더 시원하다. 원균의 모함과 모진 고문, 사형판결에 이은 백의종군과 장군의 장렬한 순국은 우리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국보 76호로 지정된 난중일기는 충남 아산의 현충사에 보존돼 있다. 1592년 임진년부터 1598년 무술년까지의 진중일기(陣中日記)로서 모두 9책으로 구성돼 있다. 역사적 사실과 학술연구 자료로서 높은 가치가 인정된다. 뿐만 아니라, 전쟁 중 지휘관이 직접 기록한 유례를 찾기 힘든 사례로 2013년 6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난중일기는 무인(武人)의 글답게 간결하며 진솔하게 쓰였다. 장군의 인품을 짐작하게 하는 웅혼(雄渾)한 필치가 돋보인다. 당연히 한자(漢字)로 기록돼 있다. 따라서 현대의 독자들은 한역서(韓譯書)를 구해 읽어야 한다. 그런데 인명, 지명, 관명 등은 물론 당시의 풍속이 난해한 부분이 여전히 많다. 한역서 중에도 자세한 해설이 붙어 있는 책이라야 비로소 이해가 쉽다. 난중일기의 본문 첫 면은 선조 25년(1592) 충무공연기 48세, 임진년(任辰) 정월(正月, 이하 음력)부터 시작된다. “초1일 임술, 맑음. 새벽에 동생 여필 및 조카 봉과 아들 회가 와서 (함께) 이야기했다. 다만 어머님 곁을 떠나서 남도에서 두 해를 보내니 지극히 한스러운 마음을 이길 수 없었다…” 장군은 난중일기 첫머리에 가족 모임과 함께 어머니에 대한 회한을 적었다. 가족 모임의 주제는 가족들의 안부에서 시작해 국내 문제에 이어 외적에 대한 정세 분석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안부는 군대의 존재 이유와 직결되는 사안이다. 군사가 목숨을 바쳐 전쟁에 임하는 것은 국가와 백성을 지키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그 때는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넉 달 전이라 일기에는 일상이 전개된다. 날씨와 가족과 부하 장수와 관료들의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일기가 이어질수록 장수들의 이름이 더욱 자주 나온다. “그들과 활쏘기를 했고, 이야기를 했다”는 문장이 여러 차례 짧게 기술돼 있다. 대화 내용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부분은 적다. 이어지는 일기 내용으로 짐작해보면, 활쏘기를 하면서 전시에 대비한 방어선 구축, 군량미의 확보, 각종 전략과 전술을 점검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왜군이 침략해 올지 모른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난중일기에서 특이한 점은 원균에 대한 부분이 꽤 자주 기술돼 있다. 원균은 당시 경상우수사였다. 장군이 수행했던 한산도 해전이 대한민국 3대 대첩에 드는 반면, 원균의 칠천량 해전은 3대 패전으로 꼽힌다. 일기에는 “(원균이) 가소롭다. 해괴하다”는 내용을 여러차례 적시하고 있다. 이것은 원균이 장군을 모함해 승진을 했고, 최악의 패장이라서가 아니라 그의 평소 인물 됨됨이와 행동거지가 해괴망측했다는 것을 지적한 대목이다. 장군은 부하 장수와 장졸들에게 매우 엄격했다. 그는 공무에 사감의 개입을 철저히 배제했다. 그는 군영의 규율이 전쟁의 승패와 직결된다고 믿었다. 그는 탈영병들을 가차 없이 즉결 처단했다. 우리가 오자병법에 나오는 ‘생즉사 사즉생(生卽死 死卽生)’을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대첩을 앞두고 처음 한 말로 알고 있을 정도다. 임진왜란이 소강 상태로 접어들었다. 정유재란이 발발하기 전 일기에는 세세한 날씨, 활쏘기와 토론, 국사 처리, 가족 안부, 군영과 군선의 준비 상황, 군량의 확보 등의 내용이 지루하게 이어졌다. 장군이 수시로 잠을 설치고, 식은땀을 크게 흘리며 시달렸다는 대목이 숱하게 나온다. 반면 한산도대첩 등 연전연승에 대한 기록은 상세한 부분을 찾기가 어렵다. 다만 전투 전에 왜군 배가 모조리 줄행랑을 쳤다는 것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독자 입장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오는 전투 신(scene, 장면)이 없어서 책이 시시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적에게 두려움을 줘서 함부로 나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조선 수군의 위용이 강력했음을 반증한다. 가장 흥미진진한 부분은 정유년 9월 16일에 벌어졌던 명량 해전이다. 잘 알려졌다시피 장군은 마지막 남은 13척의 배로 왜선 300여 척에 정면으로 대항했다. 난중일기가 표현한 판세는 ‘진퇴유곡’(進退維谷)이었다. 장군선이 거북선을 앞세우고 돌격했으나 부하 장수의 배가 멀찍이 도망가 버렸다. 장군은 부하 장수를 달래며 군령의 엄준함을 외쳤다. 그러자 모두가 사지로 뛰어들었고, 대다수가 생환했다. 장군은 “실로 천행이었다”면서 천지신명에게 사상 최대 승전의 공을 돌렸다. 명량해전 며칠 전인 정유년 9월 11일 난중일기에는 “흐리고 비가 올 기미가 있었다. 홀로 배 위에 앉았으니 그리운 회포로 눈물을 흘렸다. 천지간에 어찌 나 같은 사람이 있으리오. 아들 회가 내 심정을 알고 몹시 언짢아했다”고 기록돼 있다. 장군은 전쟁 중에 어머니가 별세했고, 셋째아들 면이 전사했다. 고향집은 쑥대밭이 되었고, 자신은 모진 고문을 받은 끝에 사형판결까지 받았다. 그러한 장군에게 백전백승의 에너지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난중일기의 마지막 장을 넘기면서, 철저히 원칙과 기본에 충실했던 ‘정중동(靜中動)’에서 장군의 필승전략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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