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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 이회영 선생을 회고함
강병찬 취재국장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20년 12월 08일(화)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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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경북연합일보 | | 고전에는 부자와 귀족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사회에 헌신하기가 쉽지 않다고 씌어있다. 사람은 대개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는 범주 내에서 생각하고 실천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부와 권력을 가진 귀족 중에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티끌같이 내려놓고 하늘의 뜻을 땅에서 실천해 성자의 반열에 드는 위인이 드물게 있다고 한다. 이 말은 권력과 부를 거머쥔 귀족들의 사회적 책임이 매우 엄중하다는 것을 웅변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어떤 왕조가 망할 때는 귀족과 토호들의 패악이 하늘을 찔렀다고 다반사로 기록돼 있다. 반면 기득권을 과감히 내려놓는 희생 정신으로 국가를 세우고, 누란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귀족이 있으니 우리는 그를 ‘영웅’이라 일컬으며 칭송한다. 더욱이 이들이 모함을 받는 등 당대에 큰 고통을 받았다면, 후세는 그를 더 애틋하게 사랑하고 존경해 마지않는다. 고구려 을지문덕, 고려 강감찬, 조선 이순신이 이런 분들이다. 그런데 근대 일제강점기에도 탁월한 인간 됨됨이로 역사를 펼쳐나간 귀족 중의 귀족, 명문 중의 명문, 위인 중의 위인, 영웅 중의 영웅이 있다.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1867년 3월 17일~1932년 11월 17일) 선생은 서울에서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의 여섯 아들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는 신라 화백회의의 수장을 맡았던 표암공(瓢巖公) 이알평(李謁平)을 시조로 둔 경주이씨이며, 조선시대 청백리의 표상인 백사(白沙)이항복(李恒福, 1556~1618)의 10대손이다. 그의 사상과 행적이 요사이 재조명되고 있다. 남북통일이 되기 전에는 제대로 된 평가가 나오기 어려울 만큼 그는 높은 인격을 실천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정치적 이유로 남북한 양쪽에서 널리 알려지지 않은 대표적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의 여섯형제는 서울 종로의 2만 평에 달하는 가산을 모조리 팔아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 를 세웠다. 한 명문가가 대한민국 국군을 양성한 것이다. 이는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가문차원의 헌신이다. 서양에서 말하는 단순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다. 그 형제 중에서도 이회영은 성인이 되면서 집안의 노비에게도 존대했고, 직접 자유를 베풀어 노예해방을 실천했다. 그 후 그는 독립 협회, 신민회, 상동교회 청년학원, 헤이그밀사, 을사오적 암살모의, 고종의 망명 계획을 세웠다. 또 신흥강습소에서 시작한 신흥무관학교, 의열단, 신흥학우단, 다물단을 이끌었다. 김좌진과 함께 결성한 재만한족연합회를 비롯해 조선무정부주의자 연맹, 남화 한인연맹, 남화통신, 흑색공포단, 중국인과 함께 항일 구국 연맹을 조직했다. 상하이북역사건, 아모이·텐진 일본군 영사관과 군수수송선 폭파 등 항일 독립투쟁을 전개했다. 애석하게도 그는 체포돼 1932년 11월, 65세로 중국 대련 일본군 감옥에서 그들에게 피살됐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중국 정부는 2000년 항일혁명 열사증서를 주었다. 우당 이회영 선생은 이제 단순한 ‘경주이씨’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당선생을 을지문덕, 강감찬, 이순신에 버금가는 민족 영웅으로 추앙해야 하는 이유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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