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분황사 모전석탑의 위용과 지극한 그리움의 재매정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20년 08월 26일(수) 19:10
|
|
|  | | | ⓒ 경북연합일보 | | 경주시 구황동에서 분황사 모전석탑(국보 제30호)을 처음 본 사람의 평가가 “야, 정말 국보답다”였다. 분황사는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3년(서기 634년)에 지어진 절이다. 원효대사가 거주하면서 화엄경소를 쓴 곳이다. 선덕여왕의 권유로 자장법사가 머물렀으며, 향찰을 만든 설총은 부친인 원효대사가 돌아간 후 그의 소상을 만들어 모셨고, 이 소상은 고려후기까지 있었다고 전해진다. 또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 경덕왕 14년(755년)에 불상주조의 대가인 강고 내말이 만든 약사여래상이 있었다고 한다. 모전석탑은 통일신라 이전에 세워졌으며, 원형이 5층인지 7층인지 9층인지 알 수 없고, 지금은 3층만 남아있다. 3층만으로 이 정도라면, 원형이 남았더라면 그 위용은 가히 상상이 어렵다. 그런데 분황사와 모전석탑과 관련된 중요한 스토리가 하나 더 있다. 바로 향가 도천수대비가(禱千手大悲歌)다. 도천수대비가는 신라 경덕왕 때 희명이 지은 향가다. 삼국유사 권3 분황사천수대비맹아득안조에 적혀 있다. 경주 한기리(漢岐里)의 여인, 희명의 아들이 생후 다섯 해 만에 갑자기 눈이 멀게 되자, 희명이 분황사 좌전(左殿)에 있는 천수대비의 벽화 앞에서 아이로 하여금 이 노래를 부르게 해 마침내 눈을 뜨게 됐다는 이야기다. 전체 노래가 10구절로 나눠지므로 흔히 십구체(十句體) 향가로 인정받고 있다. 도천수대비가를 현대어로 풀이하면 “무릎을 곧게 하고 두 손바닥을 모아 천수관음(千手觀音) 앞에 비옵나이다. 천 손의 천 눈을 하나를 놓아 하나를 덮으사 둘 없는 저울시다. 하나를 그윽이 고치기 바라나이다. 아아, 놓아주신, 자비(慈悲)야말로 클 것이외다.” 향찰(鄕札)로 표기된 내용의 해독이 연구자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 하지만 대체로 천수천안(千手千眼, 천 개의 손과 그 손바닥마다 박혀 있는 천 개의 눈)을 가진 천수관음 앞에 합장하고 앉아 “두 눈이 없는 내게 눈을 주신다면 그 자비로움이 얼마나 크겠습니까”하는 기원의 노래라는 데 일치한다. 경주시 교동에 남아 있는 재매정(財買井, 사적 제246호), 김유신 장군 부인의 이름이 재매다. 그래서 신라시대부터 유일하게 남은 금입택(金入宅, 금을 둘린 귀족의 집)인 김유신 장군 주택을 재매정, 재매 부인의 우물이라고 부른다. 김유신 장군이 그렇게 유명한데도 그 부인의 이름을 따 택호가 정해진 것이 아이러니하다. 그러나 다 이유가 있다. 태종무열왕 당시에는 전쟁이 끊일 날이 없었다. 김유신 장군이 한 전투를 끝내고, 궁궐에 입성해 승전보를 전하는 순간 또 다른 외적의 침입 소식이 어전에 전해졌다. 왕은 하는 수없이 김유신에게 또다시 출격의 명을 내렸다. 김유신은 왕궁에서 말에 올라 곧바로 전투지를 향했다. 그는 왕궁에서 멀지 않은 자기 집을 지나가면서 집 바깥에 나와 자신을 바라보는 부인과 식솔들을 애써 쳐다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말 위에서 그는 부하에게 물을 청했다. 부하가 재매정에서 물을 한 바가지 떠오자 그는 물을 들이키면서 물맛이 여전히 좋다고 말했다. 그는 그것으로 가족들에 대한 인사를 대신했다. 김유신의 부하들 또한 가족들에게 가보지 못한 상황에서 김유신의 이러한 행동은 군사들의 사기를 높여 승전을 가져오는 원동력이 됐다. 김해 가야 출신의 김유신이 삼국통일 전쟁과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끌어냈고, 흥무대왕이라는 시호를 받은 것이 단지 정치적 역학관계에만 국한된 평가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더 나아가 김유신 장군 금입택을 사람들이 굳이 재매정이라 부르는 것은 가족의 소중함은 장군과 병졸을 막론하고 인간사회에서 가장 평등하고 소중한 가치라는 것을 의미한다.
|
|
|
경북연합일보 기자 - Copyrights ⓒ경북연합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
|
|
|
|
|
|
|
|
실시간 많이본 뉴스
|
|
|
|
|
최신뉴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