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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한 사로국의 곰 신앙과 곰 신앙을 일본으로 전파한 천일창(2)
정형진 신라얼문화연구원장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20년 03월 10일(화)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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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경북연합일보 | 홍산문화는 맥족의 뿌리 단군의 어머니가 웅녀였다면, 그러니까 단군이 곰을 토템으로 하던 어머니의 아들이었다면 단군이 주도하던 사회에서는 곰 신앙이 계승됐어야 하지 않을까? 어떤 연유인지 몰라도 전통문화에는 곰 신앙 흔적이 매우 약하다. 왜 그럴까? 궁금하다. 그 답은 이렇다. 단군왕검사회의 주 신앙은 칠성신앙이었던 점과 한반도로 이동했을 때 한반도는 곰 신앙을 지속하기에 적합한 공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반도는 곰 보다는 호랑이가 더 우세한 힘을 가진 공간이었다. 그럼 지금부터는 중국 요서지역에서 발생한 곰 신앙이 한반도로 들어오는 과정에 있었던 유물과 유적을 검토해 보자. 먼저 중국 길림성 집안현에 있는 고구려 벽화고분인 각저총 씨름도를 들 수 있다. 씨름도에 등장하는 신단수와 그 아래의 두 동물 그러니까 호랑이와 곰은 단군신화가 후대에 창작된 것이 아니고 적어도 벽화를 조성하던 시기 이전부터 전해왔음을 증명한다.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와 건설한 신시에 있던 신단수를 찾아온 곰과 호랑이를 그렸다. 그들은 환웅에게 자신들도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요청했고, 청을 받아들인 환웅은 쑥과 마늘을 주면서 백일기도를 할 것을 권한다. 3·7일을 열심히 기도한 곰은 사람이 됐고, 사람이 된 웅녀와 환웅이 결혼을 해서 낳은 아들이 단군이다. 우리는 그 단군의 후손이라는 것이 단군신화의 골자다. 신화가 고구려 주민의 가슴에 살아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문헌을 보아도 고구려에 단군신화가 전달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주몽의 탄생설화가 그것이다. 『삼국유사』에는 부여의 금와왕이 태백산 우발수에서 유화를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유화가 말한다. '자신은 스스로 천제의 아들이라고 하는 해모수를 웅심산(熊心山) 아래를 흐르는 강가에서 만났다'고. 여기서 유화가 해모수를 만났던 강의 발원이 웅심산임을 알 수 있다. 이때 웅심산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고구려를 구성했던 기층민은 소수맥이라고 해서 맥족이었다. 그 맥족을 기반으로해서 부여에서 내려온 주몽이 나라를 건국했다. 그렇다면 주몽의 아버지인 해모수는 하늘(외부세력)에서 맥족들이 살고 있는 웅심산에 내려온 셈이다. 웅심산은 당시 맥족들의 성산(聖山)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맥족은 자신들의 성산, 그러니까 삼신산을 곰 산으로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후기홍산문화를 주도했던 사람들을 맥족의 뿌리라고 생각하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실제로 『후한서』에는 "웅이(熊夷)는 맥이(貊夷)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기층민이었던 맥족은 단군왕검사회에 참여했다 동으로 이동했던 사람들의 후예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다. 맥족이 이동하며 성산으로 인식했던 웅심산은 어떤 산일까? 북한에서 발행한 『조선향토대백과(2008년판)』에서는 '웅심산은 우리말로 곰 산으로 역사기록에 나오는 백두산의 옛 이름이며, 곰을 숭배하던 조상들이 자신들의 신앙과 관련해서 웅심산이라 했다'고 설명한다. 백두산이 곰 족인 맥족의 성산이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단군왕검사회의 핵심 구성원이었던 맥족 사람들이 동으로 이동해 백두산 주변에 정주하고 살았던 것만은 분명하다. 때문에 백두산 주변에서 일어난 고구려의 고분벽화인 각저총에 단군신화를 모티프로 한 그림이 그려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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