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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부를 기다리며
김영식 시인, 수필가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19년 12월 05일(목)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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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경북연합일보 | 두부를 두부라 부를 때부터 우리의 오해는 시작된다. 그건 사과를 사과라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터. 정의할 수 없는 것들을 정의하려할 때, 비로소 삶의 모순은 시작된다. 찌개를 끓이기 위해 두부를 자른다. 으깨어지지 않으려 서로 뭉치며 자신의 결속을 다지는 흰 속살들, 너머로 물컹 따뜻한 체온이 묻어나온다. 편편하게 썰어놓은 사각의 단면들이 차례를 기다리며 접시 위에 오도카니 앉아 있다. 요즘 들어 부쩍 요리하는 일이 많아지게 되었다. 아내는 이미 손수 음식을 장만하지 못할 만큼 몸이 불편하다. 나는 갑자기 닥친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어차피 누군가가 감당해야할 몫이니 어쩔 수 없다. 거부한들 바꾸어지지 않는 현실이다. 두부는 품성이 말랑말랑하다. 하지만 순하다 해서 결코 얕잡아보면 안 된다. 허허실실 온화함 속엔 범접할 수 없는 강인함이 존재한다. 아니 어쩌면 단단함으로 위장한 부드러움인지도 모르지.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듯 순종적이지만 결코 표리부동하지 않는 완고함을 지니고 있다. 자신의 의지대로 되지 않으면 스스로 뭉개져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니 언제나 살얼음 밟듯 조심스레, 신중하게 취급해야한다. 생은 두부처럼 만만한 것이었다. 언제든 내가 원하는 대로 자를 수 있다 생각했다. 된장찌개를 끓일 땐 깍두기처럼 작게, 조림을 만들 땐 그보다 조금 크게, 부침으로 부칠 땐 너비가 넓게. 젊었을 때는 두부를 세모나게 자르고 싶었다. 아니 둥글거나 별모양으로 만들고도 싶었다. 그러나 번번이 나의 의지는 무색해졌다. 세모를 원할 땐 동그라미가, 별을 원할 땐 구름이 되었다. 그것이 단지 두부 때문인지, 아니면 호락호락 하지 않은 삶 때문인지, 혹은 무능한 내 탓인지는 지금도 알 수 없지만. 두부는 다만 콩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콩에 포함된 단백질을 추출해서 간수를 첨가하여 응고시킨 것이다. 굳은 정도에 따라 순두부와 연두부로 구분한다. 삶이 두부라면 이 단순한 화학작용에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의 기대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 행이든 불행이든 자신의 생을 호들갑스럽게 떠들 일 은 아닌 것 같다. 창 밖, 아파트 정원에는 하나 둘 낙엽이 떨어진다. 어디선가는 첫 눈이 내렸다하고 순백의 설경이 TV화면에 비쳐지기도 한다. 두부처럼 흰, 차가워지는 겨울의 목덜미에 목도리를 둘러주고 싶지만. 다정도 병이라면 나의 계절은 너무 멀리 있다. 생각해보면 60여년 살아오면서 내가 마음먹은 대로 살아진 시간이 얼마나 될까 싶다. 어려선 부모님의 의도대로, 젊어선 어찌할 수 없는 현실 때문에, 중년엔 가장의 의무로. 그러니 정작 내가 살고 싶었던 삶은 장구한 시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다시 태어난다면 내 의지대로 두부를 자를 수 있을까. 어느새 찌개는 맛있는 냄새를 풍긴다. 한 끼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살신성인한 그를 기리며 아내의 밥숟가락 위에 한 점 얹어준다. 삶은 그냥 두부찌개를 먹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그렇게 무심하게 견디는 거라고. 저녁의 쓸쓸함이 내게 말해준다. 내일 또 다시 두부를 만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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