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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화백제도 정말 만장일치제였나?
정형진 신라얼문화연구원장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19년 11월 05일(화) 17:42
ⓒ 경북연합일보
중국문헌에만 화백으로 기록
 신라의 정치제도를 말할 때 가장 먼저 거론되는 것이 화백제도(和白制度)다. 화백제도는 지도자들이 소통과 견제를 하면서도 만장일치의 합의를 통해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던 제도다. 화백제도는 과연 요즈음의 민주적 방식과 유사했을까. 신라인들은 왜 화백이란 독특한 정치제도를 가지고 있었을까. 궁금하다.
 우선 '화백'이란 말이 익숙하기는 하나 그 의미가 정확하게 와 닿지 않는다. 화백이란 어떤 의미였나? 화백은 한자로 화할 화(和)자와 흰 백(白)가 합쳐진 말로, 국가의 중대사를 의논하던 회의 제도를 이르는 말 이다. 처음에는 육촌의 부족장들이 모여 중대한 안건을 처리하던 제도였으나, 뒤에는 진골 이상의 귀족들이 모여 중대사를 합의하는 회의로 변했다.
 그러나 정작 우리 역사문헌에는 화백이라는 단어가 기록돼 있지 않다. 그렇다면 어디에 제일 먼저 기록됐을까. 송나라에서 편찬한 당나라의 역사책인 『신당서』 신라전에 처음 보인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화백제도가 신라의 독특한 정치제도였다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기록되었어야 옳을듯한데 왜 없을까. 혹시 우리는 그 제도를 화백이라 부르지 않았기 때문일까.
 '화백'은 '하나로 화하는 회의' 혹은 '완전히 결점이 없는 회의' 정도로 풀이할 수 있다. 쉽게 말하면 만장일치를 통해서 안건을 처리하던 제도다. 그러나 화백이란 말이 신라에서 주로 사용하던 용어인지 아니면 신라에서 합의제로 처리하던 회의 방식을 한자화한 명칭이 화백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그리고 금석문, 그러니까 비석 등을 보면 국왕의 추대나 불교 공인, 혹은 전쟁, 법령 개정, 기타 국가의 큰일이 있으면 그 사안에 대해서 회의를 통해 결정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바로 그러한 일들을 처리하는 과정에 몇몇 귀족들이 참여해 합의를 통해 결정하던 제도가 화백이었다.
 중국인들은 신라의 합의제 결정방식인 화백제도가 특이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화백제도는 신라의 문화가 중국과 다른 독자성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다. 진한 땅 서라벌은 6촌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 촌에는 각기 촌장들이 있었고, 그 촌장들이 알천, 그러니까 지금의 북천가에 있는 언덕에 모여 회의를 해서 왕(박혁거세)을 추대하지 않았던가.
 "나라를 다스릴 임금이 없으니, 사람들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리도 덕이 있는 사람을 찾아 임금으로 모시고 나라를 세우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하니 모두들 찬성했다. 그래서 찾아낸 사람이 바로 나정이란 우물가에서 태어난 박혁거세다. 여섯 촌락의 촌장들이 모여 회의를 해서 혁거세를 왕으로 모신 것이 신라의 첫 화백회의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화백제도는 초기 사로국 시절부터 있었던 제도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부족회의로 출발했던 화백제도는 김씨왕들이 왕권을 세습하는 단계에 이르면 귀족회의로 그 성격이 바뀐다. 그러한 변화는 왜 생겼을까. 그것은 진한 사로국 단계에서는 왕과 육촌세력이 협의하여 국가의 중대사를 처리했는데, 김씨왕들이 세습하는 단계에서는 왕과 귀족이 국가의 중대사를 처리하는 사회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초기 신라를 주도하던 세력 중 일부는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났음을 의미한다.
 자 그럼 신라의 화백제도가 어떻게 기록되었는지 한 번 살펴보자. 먼저 중고기 신라의 사정을 알 수 있는 『수서』 신라전에 화백제도로 추정할 수 있는 사안이 기록돼 있다. "대사가 있으면 군관(郡官^권력 중심에 있는 여러 사람)을 모아 자세히 의논하여 결정한다." 그리고 『신당서』 신라전에는 "일에는 반드시 무리[衆]와 더불어 의논하니 화백이라 부르며 한 사람이라도 (의견이)다르면 파(罷)한다(통과되지 않은 것으로 한다)"는 기록이 있다. 화백이라 분명히 표현하고 있다. 이런 자료를 보면 신라에서는 초기부터 중고기를 거쳐 통일신라 때까지 화백제도가 내내 작동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화백제도는 『신당서』 의 표현대로 정말 만장일치제였을까. 그렇다. 기록상으로만 보면 '무리와 의논을 하는데 한 사람이라도 의견이 다르면 회의는 무효'였다고 돼 있다. 아마도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할 때처럼 처음부터 얼마간은 만장일치제로 운영됐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귀족회의의 성격을 지녔을 때도 만장일치제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경북연합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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