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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의미
경북연합일보 기자 / 입력 : 2020년 07월 07일(화) 17:57
↑↑ 정석준 전 경주불교연합회장/ 법사
ⓒ 경북연합일보
우리는 평상시에 존경하고 사랑하던 가까운 사람이 우리의 주변을 훌쩍 떠나버릴 때 죽음에 대한 막연한 불안과 공포, 삶에 대한 애착이 가슴 한구석에 뜨겁게 일어남을 본다.
 모든 성인들의 죽음은 항상 여여(如如)하여 자유자재(自由自在)하나 우리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항상 불안이며 미지의 영역이고 어둠의 상징으로 묘사된다. 이 양자의 극적 표현은 부처님 입멸당시의 열반상 만다라를 보면 여실히 드러난다.
 부처님은 베사리에 이르렀을 때 "석 달 후에 열반에 들겠다"고 말씀하시고 쿠시나가라로 향하셨다. 부처님께서 쿠시나가라에 도착하자 아난다에게 이르셨다.
 "저기 사라수 아래에 가사를 네 겹으로 깔아다오. 나는 오늘 밤 여기에서 열반에 들겠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사람들은 슬퍼하면서 사라수의 숲으로 모여 들었다.
 부처님은 무수히 모여든 제자들을 돌아보며 마지막 가르침을 펴시었다. "너희들은 저마다 자기 자신을 등불 삼고 자기를 의지하여라. 진리를 등불 삼고, 진리에 의지하여라. 이밖에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된다. 죽음이란 육신의 죽음이란 것을 잊지 말아라. 육신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므로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여래는 육신이 아니라 깨달음의 지혜이다. 육신은 여기에서 죽더라도 지혜는 영원히 진리와 깨달음의 길에 살아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은 덧없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여라" 이 말씀을 남기고 부처님은 편안히 열반에 드셨다. 죽음, 그것은 영원한 소멸인가, 아니면 그것은 새로운 윤회의 시작으로 새로운 삶의 시작인 것인가? 티벳트의 '사자의 서(死者의 書)'에서는 "인간아, 너는 너의 의사에 반하여 죽는구나. 죽음이 무엇인지 배우지도 못하고서 죽음을 배울지니라. 그러면 그대는 삶까지도 배우게 될 것이니라. 죽음을 배우지 못한 자는 삶까지도 아마 배울 수 없게 될 것이니라"고 말하며, 생이란 죽음에서 시작한다고 가르친다.
 불교의 유식학(唯識學)에서는 인간의 심층심리를 제5식·제6식(의식)·제7식(말나식)·제8식(아뢰야식)으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이중 제8식 아뢰야식이 윤회의 주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아뢰야식이란 사람이 업(행위)을 지으면 그것이 하나도 소멸되지 않고 마치 곳간에 물건을 쌓아 놓듯 저장이 되는데, 이러한 업의 처소를 아뢰야식이라고 하며 이것이 내생에 태어나는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내생을 믿고 행하는 행사로 49재를 들 수 있다.
 사람이 죽으면 49일 동안 죽음의 세계를 해매이게 되는데, 돌아가신 이에게 경전을 읽어줌으로써 망령이 지혜의 눈이 열려 좋은 곳으로 환생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것이 인간의 궁극적 문제 해결이 아님은 말할 것도 없다. 진여(眞如)의 세계를 대오각성하면 구름 걷힌 해와 같이 모든 상대적 갈등의 모순으로부터 벗어나 연기법 속에서의 이 온 우주는 무차별한 평등의 세계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미혹된 중생들은 완전한 지혜의 눈을 뜨기 전까지는 자신이 지은 선악의 업력에 따라 천상·인간·지옥 등, 삼계육도(三界六道)에 윤회하는 철저한 인과응보의 세계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이 49일간의 죽음의 세계는 자기 마음의 장난이며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이다. 이렇듯 우리 미혹된 중생에겐 죽음의 여로는 고달프게 보인다. 그러나 이 죽음이 있기에 인간은 성숙되어 가며 완성되어 간다는 역설을 낳을 수도 있는 것이다.
 불교의 다비의식을 보면 "나서보매 어느 곳으로 쫓아 왔으며 죽어 가매 어느 곳을 향하여 가는가? 나는 것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나는 것과 같고 죽는다는 것은 한 조각 구름이 사라지는 것과 같도다.
 삼연(三緣: 부·모·자)이 화합하여 잠시 이루어졌다가 사대가 흩어지고 홀연히 공으로 환생함을 얻었으니 몇 해나 저 허무한 세계에 돌아다녔던가? 이제 아침에 벗어 버렸으니 경쾌하기가 마치 마른 쑥대를 만난 것 같도다"라는 다비 의식문을 염송한 다음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불타는 다비 더미를 돈다. 모든 것이 충만한 일원상(一圓相)이여 열반 만다라이다.
 불교에서의 다비식과 49재는 초상집의 침통한 분위기와는 다른, 잔치집 같은 흥이 있는 망자(亡者)의 새로운 삶의 시작을 축복하는 것일까? 장자의 처가 죽자 혜자가 조상을 간 즉 장자가 토기대야를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
 혜자가 이를 보고 "한 평생 동고동락한 처가 죽었는데 그럴 수가 있느냐?"고 하자 장자는 "그렇지 않다. 내 처가 죽은 것이 이것이 처음이라면 어찌 처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본디 근본을 생각하면 본래 생이란 없는 것이다. 모양도 없고 기(氣)도 없다. 만물지간에 섞여서 변하여 기가 생기고 또 변하여 이처럼 처는 죽음으로 돌아간다. 이렇게 함으로써 처는 춘하추동의 영원한 과객이 된 것이다. 그러하니 처의 몸이 죽어 큰 집에 누워 있거늘 내 어찌 소동을 피우며 통곡하고 슬퍼하겠는가? 그런 짓은 사리를 분별치 못한 행위이니 이 때문에 곡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 세상 모든 위대한 성현들은 삶의 연장으로써의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승찬대사는 법회하던 큰나무 밑에서 합장한 채 서서 입적하였으며, 인곡선사께서는 "오늘 떠나겠다" 고 하시며 제자에게 말하자, 한 제자가 "내일이 백중명절이니 떠나시려면 내일 가시지요"라고 여쭙자 선사께서는 "이날이 그날이고 그날이 이날이지, 그런 삿된 생각은 말라"고 하시며 다음날 입적하시므로 죽음마저도 희롱해 버렸다.
 죽음은 삶의 완성이고, 확장이고 휘날레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삶의 의미를 믿는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은 삶을 중단할 것이다. 또한 죽음의 의미를 믿는 자만이 삶의 의미를 받아들일 수 있다. 죽음은 삶에 속하기 때문이며 죽음 속에서 삶의 의미를 분명히 알기 때문이다. 죽음의 평화가 느껴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생의 리얼리즘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삶이 깨끗한 아름다운 삶이라면 그의 죽음의 여로는 삶의 연장만큼이나 아름다울 것이며, 그의 생이 육체적 안락과 쾌락의 삶을 살았다면 육체를 버려야 한다는 것 때문에 죽음의 여로는 불안하고 공포로 나타날 것이다.
경북연합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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