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경북연합일보 | | 이종암(사진·李鍾巖·1896.1.12.~1930.5.29) 선생은 대구·경북이 낳은 의열투쟁 의사로서 대표적 인물이다. 대구부(府) 대구군 해북촌면(뒤에 가서 경북 달성군 공산면이다가, 현재는 대구시 동구 공산동으로 편제되었음)의 백안동에서 태어났다. 하빈이씨 석능(石能)과 남원양씨의 차남으로 본명은 종순이었는데, 형과 누이들의 조사(早死)로 인해 귀한 자식이 되었기에, "바위 같이 튼튼하게 오래 살라"는 뜻으로 지어진 아명이 종암이었다. 독립운동기에는 외가 성을 따서, 양건호·양주평·양근오 등의 가명을 쓰기도 했다. 대구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대구농림학교를 다니다 1년 만에 중퇴했다. 그 후 들어간 부산상업학교도 학비 조달이 어려워 곧 그만뒀다. 1914년 고모부 정재학의 후견에 의해 대구은행에 입행한 그는 1년 후 출납계 주임으로 승진하고, 서희안을 반려로 맞아 결혼했다. 독립운동 비밀결사 대한광복회의 군자금 조달을 위한 1916년 9월의 '대구권총사건'과 1917년 11월의 친일부호 장승원(張承遠) 처단사건은 이종암의 마음에 적지 않은 울림을 남겼다. 1917년 12월의 어느 토요일, 만주에서 온 독립운동가와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은행돈 1만9천원을 가지고 미국유학을 하려다가 만주로 가서, 그 이듬해에 통화현 독립군군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학을 배웠다. 1919년 상해에서 폭탄제조법을 배우고 의열단을 조직한 뒤 단원 최경학에게 폭탄을 가지고 국내에 잠입하게 해 밀양경찰서를 폭파하려다가 실패했다. 1920년에 의열단 부단장이 된 뒤 폭탄을 밀수입해 일본 각 기관 파괴를 기도하였으나 발각돼 실패했다. 1922년 3월 상해를 방문한 일본육군대장 다나카를 저격하다가 실패하고 붙잡혔다. 뒤에 탈출해 1923년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신임장을 휴대하고 군자금모금차 밀입국해 활약하던 중 대구에서 일본관헌에 잡혀 13년형을 선고받았다. 일제 관헌은 이 사건을 경남·북 지방의 의열단 조직세를 압박하는 호기로 삼으려 하여, 집요한 신문과 혹독한 고문이 만 1년 동안 피의자들에게 수시로 가해졌다. 결국은 4명 기소로 예심이 종결된 1926년 11월에야 당국은 사건 전모를 공개하였고, 언론은 '경북 의열단사건'이라고 이름 붙여 크게 다뤘다. 법정에서 이종암은 태연하고도 당당한 자세로 신문에 응대하였다. 재판장을 향해서는 "우리 조선이 일본의 압박에서 벗어나려면 불가불 혁명을 할 수밖에 없지 않소!"라고 질타했다. 대전형무소로 이감돼 복역하며 옥고를 겪던 이종암은 위장병·폐병·인후병 증세가 겹쳐서 매우 악화된 때인 1930년 5월에 가출옥하였다. 피체 구금 후 4년 6개월 만에 너무 위중해진 상태가 되어서야 석방된 그는 결국 열흘 후인 5월 29일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간고한 투쟁의 생애를 35세를 일기로 마감하고 순국한 것이었다. 정부는 그의 거룩한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김희동 기자
|